앞으로 50년간 누구도 이 그림을 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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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전유신의 벨 에포크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는 최초의 추상화가로 알려진 칸딘스키보다 몇 년이나 앞서 추상화를 그렸지만, 유럽의 변방인 스웨덴에서 활동한데다 여성 화가라는 이유로 미술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작가가 작고한 지 75년이 지난 2018년에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 미래를 위한 회화>전을 계기로 비로소 클린트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전시는 구겐하임 미술관 개관 이래 최대 관객 수인 60만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은 데 이어, 다음 해에는 유럽의 주요 도시로 순회전시 되면서 천만 명 이상이 관람하기도 했다. 2019년에는 클린트의 드라마틱한 삶을 재조명한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작고한 지 80여 년 가까이 되는 시점에서야 뒤늦게 클린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클린트는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출생해 왕립 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이 시기에는 주로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풍경과 인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지만, 한편으로 그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의 모습에도 관심을 가졌다.
자신보다 8살이나 어린 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과 신의 계시와도 같은 음성을 직접 들었던 경험은 현실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한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20세기 말 유럽과 미국에서 젊은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던 신지학의 영향도 클린트를 영적인 세계로 이끌게 된다.
신지학은 신비적인 계시와 직관에 의해 신과 소통하고, 종교 간의 대립을 초월해 절대자와 근원적인 합일을 이룰 것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철학이었다. 신지학자들은 정신적인 것을 시각적으로 가시화하는 것을 중요시했고, 특히 색채와 형태가 사람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해 영적인 세계에 도달하게 해준다고 보았다.이런 이론을 바탕으로 신지학자들은 특정한 색마다 상징적이고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파란색은 천국과 순수함을, 노랑은 지상을 상징하는 색으로 보는 식이다. 이 때문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시각화하고자 했던 당대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신지학의 이론은 계시이자 교리처럼 여겨졌다. 클린트뿐 아니라 칸딘스키나 몬드리안과 같은 초기 추상 미술가들 대부분이 신지학에 심취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신지학에 기반해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를 그리고자 했던 클린트는 44세 되던 해인 1906년 <원시적 혼돈>이라는 첫 추상화 연작을 제작했다. 나선형의 소용돌이치는 곡선들과 기하학적인 형태들로 구성된 이 연작은 그의 대표작인 <10점의 대형 회화>를 비롯한 또 다른 연작을 연이어 등장시키는 출발점이 되었다. 자연의 형태를 연상케 하는 유기적인 곡선과 기호들로 가득차 있는 압도적인 크기의 <10점의 대형 회화> 연작은 어린 시절부터 노년까지 이어지는 삶의 10단계를 추상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1908년 클린트는 독일의 유명 신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를 초청해 이 연작들을 보여주었다. 당대의 스웨덴에서 여성 미술가들의 위상은 보잘것없었고, 그들의 작품은 전시회장의 가장 구석진 자리나 계단 옆에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신지학은 인종, 종교, 신분의 구별 없는 우애 정신을 강조했던 만큼, 클린트는 이에 기반해 신지학 운동을 이끌었던 슈타이너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편견 없는 평가를 해줄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앞으로 50년간 누구도 이 그림을 봐서는 안 된다는 저주와도 같은 말을 남긴 채 자리를 떠났다.슈타이너는 클린트의 추상화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우려해 이처럼 극단적인 조언을 해주었을 수 있다. 한편으로 그의 평가에서는 여성 화가인 클린트가 창조한 놀랍고도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남성 비평가의 편견 어린 시선이 엿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 지 6년 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도 추상화를 그리게 된다. 슈타이너가 이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50년간이나 사람들에게 공개해서는 안 될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렸을지는 미지수다.
슈타이너의 평가는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클린트는 이후로도 작품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고, 작고 당시에는 무려 천여 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작가의 열정과 엄청난 작업의 양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그의 작품은 호의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클린트는 70세가 되던 1932년 작품을 직접 선별한 뒤 특별한 표식을 남긴 작품은 자신의 사후 20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공개하도록 유언을 남겼다.2018년 구겐하임 미술관의 전시는 당대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미래를 위한 회화’로만 존재했던 클린트 추상화의 전모를 소개한 출발점이 되었다. 3년 뒤인 2021년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는 여성 추상미술가들을 재조명하는 기념비적인 전시를 개최했고, 여기에 클린트의 작품을 포함시켰다. 올해 4월부터 런던의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는 클린트와 몬드리안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2인전이 열리고 있다. 클린트와 몬드리안을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동등하게 바라보는 관점을 바탕으로 기획된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전시는 구겐하임 미술관의 전시 이후 몇 년 사이 변화된 클린트의 위상을 확인시켜준다.20세기 현대미술사는 이미 완결되어 더 이상 수정할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클린트라는 작가의 발굴은 추상미술의 역사를 다시 서술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준다. 클린트처럼 당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작가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은 중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유신(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