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 포근함에 긴장 풀린 순간…'악마의 4단 그린'을 만났다

대한민국 '시그니처 홀' 2023
(6) 남춘천CC
빅토리코스 9번홀(파4)

원시림 살아있는 '산악 코스 정수'
27홀 규모 부지에 18홀만 넣어
일반 산악코스와 달리 넓고 길어
스피드 3.0m의 빠른 그린까지

2019년 주인 바뀐 뒤 '환골탈태'

윤일정 회장 인수 후 코스 정비
웰링턴CC 설계자가 밑그림
시공은 삼성에버랜드가 맡아

한숨이 절로 나오는 '4단 그린'

왼쪽엔 계곡, 오른쪽엔 수풀
폭 50m … 물결치는 초대형 그린
프로대회서 버디만큼 보기 나와
조수영 한국경제신문 기자가 강원 춘천시 남춘천CC의 시그니처홀인 빅토리코스 9번홀에서 티샷을 하고 있다. 춘천=임대철 기자
대한민국이 ‘산의 나라’라는 걸 골퍼들은 주말마다 체감한다. 평지에 자리 잡은 골프장보다 산에 터를 잡은 골프장이 훨씬 많아서다. 산악 코스를 밟을 때마다 주말 골퍼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좁고 짧다’는 이유에서다. 산을 깎아 페어웨이를 조성해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넓고 길게 만들려면 공사비가 훨씬 많이 드니까.

강원 춘천에 있는 남춘천CC는 조금 다르다. 꽤 험준한 금병산과 방아산 기슭에 있는데도 페어웨이 폭이 평균 75m, 최대 107m에 이른다. 웬만한 평지 골프장에 뒤지지 않는다. 전장은 6812m(7450야드)로, 남자 프로골프 대회를 치르고도 남을 정도다.남춘천CC 입구에서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길을 타자 왜 이곳을 ‘산악 코스의 정수’로 부르는지 알 수 있었다. 가파른 기울기에 차가 힘들어했다. 도로 양옆으론 줄잡아 수백 년은 이 터를 지켰을 법한 원시림이 버티고 서 있다. 오르막과 내리막, 긴 홀과 짧은 홀이 번갈아 나오니 아까 친 샷을 또다시 칠 일이 없다. 14개의 클럽을 한 번씩 다 휘둘러 볼 때 즈음 남춘천CC의 ‘얼굴’이 나왔다. 빅토리코스 9번홀(파4)이다.

○“한국 최고의 변별력 코스”

남춘천CC는 2011년 회원제 클럽으로 태어났다. 꽤 고급이었다. 명문 골프장으로 꼽히는 남촌CC, 더스타휴, 웰링턴CC(그리핀-피닉스코스) 등을 설계한 송호골프디자인의 송호 대표가 밑그림을 그렸다. 27개 홀을 넣을 수 있는 135만㎡ 부지를 확보해놓고 18개 홀만 앉혔다. 공사는 삼성에버랜드에 맡겼다. 삼성이 개발한 ‘안양중지’가 이 골프장에 식재된 이유다.

널찍한 부지에, 명망 있는 업체에 설계와 시공을 맡겼으니 당연히 좋은 평가가 나와야 하는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호평보다 악평이 많았다. 하드웨어는 좋은데 코스 관리를 안 한다는 게 이유였다. 결과는 ‘코스 방치→골퍼의 외면→적자 심화→코스 방치’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굴레였다.‘버려진 골프장’의 진가를 알아본 이는 윤일정 MDI레저개발 회장이었다. 건설(35년 경력의 토목전문가)과 골프(싱글 핸디캡)를 두루 잘 아는 그의 눈엔 ‘관리만 잘하면 명문이 될 코스’로 읽혔다. 그러곤 2019년 실행에 옮겼다. 윤 회장은 “오랜 기간 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나쁜 평가를 받았지만 기본적인 설계와 레이아웃이 훌륭하다고 봤다”며 “시간과 돈을 투자하면 분명히 살아날 거라는 확신이 들어 사재를 털었다”고 말했다.

새 주인을 만난 뒤 골프장은 빠르게 변신했다. 페어웨이는 안양중지로 빽빽하게 찼고, 그린 빠르기를 3.0m(스팀프미터 기준) 안팎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굿 샷엔 보상, 미스 샷엔 응징’이란 의미의 ‘샷 밸류’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확실한 코스로 만들겠다”던 송 대표의 의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윤 회장이 제주도에 있는 5성급 리조트인 씨에스호텔을 운영하며 터득한 식음 서비스 노하우를 더하니 골프장의 신분이 바뀌었다. 골프업계 관계자는 “몇 년 전만 해도 많은 골퍼가 남춘천CC를 라비에벨, 라데나GC, 베어크리크 춘천보다 몇 수 아래로 봤는데 지금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골프장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4단 그린의 늪을 피하는 법

시그니처홀은 골퍼의 마음을 처음부터 불편하게 하는 홀은 아니었다. 일단 핀이 한눈에 보이는 게 마음에 들었다. 거기까지였다. 레드 티에서 핀까지는 281m(화이트 티는 315m). 여성이 공략하기에 짧은 거리는 아니다. 게다가 그린까지 쭉 오르막이라 실제 거리는 30m 이상 더 봐야 한다.홀 왼쪽에는 기다랗게 계곡이, 오른쪽에는 울창한 숲이 있다. 윤 회장은 “좁아 보일 수 있지만 페어웨이 폭이 85m다. 부담 갖지 않고 힘껏 휘둘러도 된다”고 부추겼다.

왼쪽 해저드를 너무 의식했는지 티샷은 페어웨이 오른쪽 끝에 걸렸다. 통상의 산악 코스였다면 언덕배기에 공이 박혔을 정도로 방향이 틀어졌다. 마치 쇼트 티를 꽂은 것처럼 힘 좋은 중지가 살짝 띄워준 공을 5번 우드로 때려 그린 왼쪽 러프로 보냈다. 기록적인 폭우가 이어진 7월이었는데도 잔디는 적당한 길이로 촘촘하게 페어웨이를 채웠다.

핀까지 거리는 대략 60m. 눈앞에는 폭이 50m에 이르는 거대한 그린이 4개 층으로 물결치고 있었다. 골퍼에게 잊지 못할 악몽을 안겨주는 악명 높은 4단 그린이다. 52도 웨지를 잡으려는 기자에게 윤 회장이 “한 클럽 크게 잡아보라”고 말했다.“짧게 떨궈 오르막 퍼트를 치는 것보다는 5~10m 길게 보낸 다음 내리막 퍼트로 살살 달래 치는 게 낫다”는 조언이었다. 피칭웨지로 가볍게 친 공은 운 좋게 1단과 2단 사이 턱을 맞고 내려와 1단 그린에 자리 잡았다. 이제 퍼트만 잘하면 된다. 이날 그린스피드는 2.9m. 폭우와 불볕더위가 번갈아 괴롭히는데도 그린 상태는 좋았다. 핀에 붙이자는 심산으로 퍼터를 공에 살짝 대기만 했다. 2퍼트, 보기로 홀아웃했다.

상대적으로 편안했던 빅토리코스를 마무리하자 무시무시한 챌린지코스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름 그대로 도전적이다. 남춘천CC에 ‘핸디 감별기’란 별명을 안겨준 코스이기도 하다. 윤 회장은 “대다수 아마추어 골퍼는 평소보다 5~10타 더 나온다고 한다”며 “남춘천CC에서 싱글을 쳤다면 아마추어 최강자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기록을 살펴보니 프로들도 헤맸다. 지난해 이곳에서 열린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하나금융 인비테이셔널에서 4라운드 동안 나온 보기 이상 스코어는 1111개로, 버디(1579개) 못지않게 나왔다.하루 80팀을 7~8분 간격으로 받는다. 대부분 홀이 원시림으로 둘러싸여 오붓하게 라운드를 즐길 수 있다. 그린피는 주중 18만8000원, 주말 25만원이다.

춘천=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