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휴가와 시

다낭에 와 있다. 같이 온 친구는 조금 화가 나서 자는 척하고 있다. 내가 이곳까지 와서 마감을 하고 있어서다. 빨리 끝내고 여행의 마지막 밤을 긴긴 수다로 채우길 기대하고 있을 친구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닥치지 않으면 아무런 마음도 생기지 않는 걸 어쩌겠는가.

저녁 식사와 함께 곁들인 칵테일은 완벽했고 숙소로 돌아와 다른 데도 아닌 책상 앞에 앉을 수 있다는 건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행운이기도 하니까. 호텔의 책상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널찍하며, 오른손 가까운 곳엔 언제든지 입으로 가져올 수 있도록 커피가 담긴 컵이 놓여 있다.
게다가 나는 베트남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를 입은 채다.노란빛이 은은하게 도는 아오자이 중앙에는 한무더기의 흰꽃이 심장을 둘러싼 듯 수놓아져 있다.
오늘 낮에 시클로를 타고 한 시장에 가서 산 것이다. 놀라운 건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옷이라는 점이다. 친구는 이걸 사겠다는 나를 뜯어말리다 포기했다. 좀 더 둘러보고 고민한 뒤 사도 늦지 않다는 잔소리가 계속됐지만 나는 이미 호객 행위에 정신이 쏙 빠져 있었다. 말도 안 통하는데 원단을 고르고 사이즈도 쟀다. 근 30분 만에 현장에서 재단하고 재봉까지 마친 아오자이 한 벌을 얻을 수 있다니!
매번 이런 식이다. 신중함이라곤 없다. 대책 없는 결단력의 좋은 점을 찾을 수도 있겠지? 언젠가 자기계발서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고민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생산적인 일에 쓴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나는 이미 성공한 건데….

하지만 다들 신중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나? 고민의 시간이 부족하면 충동적으로 결정하기 쉬울 텐데 어쩌려고 이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욕망에 솔직해서 나쁠 건 뭐람. 이리저리 사회적 잣대를 들이대고 이 사람 저 사람 눈치 보느라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가혹한 결정을 내리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얼마 전 미아사거리역 부근에 친구들(유현아, 김현 시인)과 23.14㎡(7평) 크기의 작은 상가 하나를 얻었다. 우리는 그곳을 해변이라 부르기로 했다. 김현 시인이 지은 이름인데, 원래 만화가 정원 님이 꾸려가던 연신내 공간을 부르던 것이었다.지금은 없어진 공간이지만 이름이 남았고 그걸 이제 우리가 가져다 쓰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름 때문인 것 같다. 구경만 하러 가서 충동적으로 계약한 것 치고는 기분이 너무 좋다. ‘해변 낭독회’ ‘해변 글방’ ‘해변 전시회’ 같은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복잡한 일들을 가뿐히 해치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충동적인 마음을 억눌렀을 때보다 충동적으로 선택한 일 때문에 행복했던 기억이 많다.
지난 겨울엔 한 시인이 또 다른 시인에게 마음대로 상을 주면 어떤가 하는 생각에서 문학상과 비슷한 <내가 좋아한 그 사람의 시>를 제정했다. 상패는 시와 어울리는 플레이모빌로 하기로하고 부상도 상금도 주는 사람 마음대로다.
겨울엔 유현아 시인이 차유오 시인에게, 봄엔 김현 시인이 김은지와 조용우 시인에게 줬고, 여름엔 내가 황인찬 시인에게 줬다. 충동적으로 시작해서 잘될까 싶었는데 누군가의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 솔직한 마음을 기념할 수 있다는 것이 주는 행복감이 예상보다 훨씬 컸다.간판이 즐비한 거리를 걷다 보면 ‘대박약국’ ‘행복 국수’ 하나같이 순정하게 내걸린 이름들이다. 자신들의 욕망을 얼마간 투명하게 들여다봤을 이름들이다. “이름이 사라지고 있다는 가게를 하나씩 찾아가 보고 싶었다/소식은 언제나처럼 순식간에 소멸한다.” 유현아 시인의 시 <사라지고 있는 어느 계절에 사직서를 쓰고 싶었다>의 한 구절처럼 사라지지 않길 바라는 세계가 도처에 간판을 내걸고 있다.

여행을 준비하며 습관처럼 마스크를 챙겨왔다. 어느새 비행기 안에서조차 마스크를 쓰지 않는 때가 왔다. 호이안 야시장을 거니는데 마스크를 벗으니, 마스크의 존재감이 이렇게 컸었나 싶다. 온갖 냄새를 무방비 상태로 맡는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과거를 발굴하는지도 모른다. 겨울 속에서 여름에 대한 시를 썼던 것처럼 어제는 무더위 속에서 차가운 시 한 편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