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불모지'를 대한민국 미술 명소로 만든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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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서울 북동부는 오랜 기간 ‘문화 불모지’였다. 큰돈이 들어가는 클래식 공연장은 차치하더라도 웬만한 곳엔 다 있는 그럴듯한 미술관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노원구 중계동에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이 문을 열었을 때 이 일대 주민들이 환호한 이유다.
개관 10주년 특별전
"외진 곳에 왜 이리 크게 짓느냐"
10년 전 건립 때 논란있었지만
'지역특화 미술관' 콘셉트로
동북부지역 문화 갈증 해소
'SeMA 앤솔러지: 열 개의 주문'
미술관의 역사와 의미 되새겨
엄숙하고 진지한 일반적인 미술관과 달리 ‘동네 주민들의 놀이터’처럼 쓰이는 지역밀착형 미술관의 대표주자인 북서울미술관이 개관 열 돌을 맞는다. 북서울미술관은 이를 기념해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을 내다보는 기념전을 준비했다.
동네 미술관의 성공 방정식
서울시가 북동부 지역에 대형 미술관 건립을 추진할 때만 해도 문화계에선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562억원(공사비)을 들여 서소문 서울시립미술관 본관보다 큰 대형 미술관을 짓기엔 장소가 너무 외지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규모가 커도 미술관 경쟁력의 핵심인 접근성이 떨어지면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등과 겨룰 수 없다는 얘기였다.서울시의 해법은 북서울미술관의 콘셉트를 기존 미술관과 완전히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었다. ‘문화소외지역 주민의 문화 욕구를 풀어주겠다’는 설립 취지에 맞게 누구든 어느 때나 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터를 아예 공원(등나무문화공원) 안에 잡았고, 미술관 문도 1년 내내 잠그지 않도록 했다. 콘크리트 대신 유리로 벽을 만들어 안과 밖이 소통하는 미술관으로 꾸몄다.
하나 더 있다. 주변이 아파트 천지인 데 착안해 ‘어린이 전용 전시관’을 넣었다. “아이와 함께 들르면 하루종일 신나게 놀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동네 주민은 물론 서울 전역과 경기 주민도 찾는 명소가 됐다. ‘동네 미술관’이 전국구 미술관으로 이름을 알리는 성공 방정식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뒤따랐다.미술계 관계자는 “지리적 접근성과 전시 전문성 등을 감안할 때 기존 대형 미술관과 정면승부는 어렵다고 보고 지역특화 미술관으로 방향을 잡은 게 ‘신의 한 수’였다”며 “전시장이 큰 데다 시설도 좋은 만큼 해외 유명 작가의 대형 전시를 할 수 있는 잠재력도 갖췄다”고 말했다.
10년 뒤돌아보는 기념전 열어
지금 북서울미술관에는 지난 10년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 ‘SeMA(Seoul Museum of Art) 앤솔러지: 열 개의 주문’이 열리고 있다. 10주년 기념전에 걸맞게 10명이 참여한 기획 전시다. 구기정 권혜원 기슬기 김상진 노은주 박경률 박성준 전병구 박이소 등 화가 9명과 시인 최재원이 참여했다.미술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제로 한 작품을 주로 걸었다. 권혜원 작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지난 10년간 미술관을 위해 일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뒤 그걸 토대로 작품을 만들었다. 미화실, 풍동실 등 일반 관객은 모르는 미술관의 숨은 모습을 공상과학(SF) 영화로 구성했다. 현장에서 만난 권 작가는 “‘미술관이 문화공간이 아닌 직장이라면 어떨까’란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기슬기 작가는 북서울미술관이 10년간 진행한 전시 포스터를 전부 모아 대형 벽면에 붙인 작품을 내놨다. 과거의 전시를 모아 놓고 ‘현재 전시’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였다. 그 앞에는 10주년 기념전시 포스터를 계속 이어 붙여 하나의 기념비처럼 만든 작품 ‘지난 전시와 다가올 전시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 포스터 중에는 북서울미술관이 지난해 7월부터 서도호 작가와 함께 선보인 ‘서도호와 아이들: 아트랜드’도 있다. 서 작가가 점토로 만든 인형과 장난감을 산처럼 쌓아 올린 작품이다.
체험형 미술은 꼭 어린이를 위한 것만 아니다. 1층 전시장에 마련한 박경률 작가의 ‘만남의 광장’은 거울과 밧줄, 비닐봉지, 대파 등을 바닥에 널어놓은 작품이다. 관람객은 이 물건들 사이를 피해 지나가야 하는데, 조금만 부주의해도 거울을 깨뜨리거나 밧줄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기자가 찾은 날도 거울 하나가 깨졌다. 박 작가는 “훼손도 작품의 한 부분”이라고 했다. 내 앞을 지나간 누군가의 흔적을 작품 창조의 과정으로 본 것이다. 전시는 10월 25일까지.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