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지만, 두려움만은 아니다… 소설 <조금 뒤의 세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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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연수의 듣는 소설▶조금 뒤의 세계
▶조금 뒤의 세계 2
남자에게 팔이 잡혀 끌려갈 때, 그녀의 내면에서는 두 가지 미래가 서로 뒤섞인 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술 취한 아버지가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의 뺨을 때리는 미래와 그가 잡은 손을 놓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미래. 앞의 미래는 가만히 두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이었고, 뒤의 미래는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가 닿을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세계는 그랬다. ‘그렇지만’ 나뭇잎은 떨어지지 않았어. 지금부터의 세계는 달라질 거야. 달라지게 내가 만들어야 해. ‘현재로서는 터무니없는 믿음이지만……’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그녀는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쓰며 그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 남자는 몸집이 컸다. 그것만으로도 무서웠다. 그러나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저씨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사진관으로 달려갔어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몰라 저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서 있었죠. 잠시 뒤 사진기를 들고나온 아저씨는 제 얼굴을 촬영해도 괜찮겠냐고 물었어요. 그때 저는 어리고 약한 존재였지요. 그 말은 누구도 제게 의견을 물어본 적은 없었다는 뜻이에요. 무서웠지만 저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계속 좋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뭇잎을 뜯는다고 혼내다가 갑자기 얼굴을 찍는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군요.”
“그때는 저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저는 행동했죠. 그게 핵심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핵심이라니, 무엇의 핵심이죠?”
“다른 사람에게 맡긴 나의 미래를 되찾아오는 일의 핵심.”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나는 고개를 돌리고 잡지의 표지를 다시 쳐다봤다.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門化光도 그대로였다.
“혹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라는 사진작가를 아시나요?”
그녀가 내게 물었다.
“모릅니다.”
“저도 그 아저씨에게 들은 이야기에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고 해요.”
그녀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은 회화처럼 찍어야 한다는 편견에 맞서 사진만의 예술성을 찾아낸 첫 사진작가다. 사진이란 현실의 풍경을 그대로 담는 것이라는 낡은 생각에 사로잡힌 평론가들은 그의 사진이 좋은 이유를 사진 이전에 먼저 좋은 피사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먼저 좋은 장면이 있어야 사진가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생각. 이 생각에 맞서기 위해 말년의 스티글리츠는 우연한 피사체, 즉 그날그날의 구름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게 그의 마지막 작품인 ‘이퀴벌런트(equivalent)’ 연작들이다.
가치, 의미, 중요도가 동등하다는 뜻의 단어인 ‘이퀴벌런트’는 스티글리츠의 사진에 두 가지가 겹쳐 있음을 암시한다. 시작은 눈앞의 현실이다. 카메라는 어떤 현실이라도 받아들인다. 그게 좋은 피사체인지 나쁜 피사체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걸 결정하는 것은 사진가의 내면이다. 사진가는 내면이라는 앵글로 현실을 바라보다가 내적 욕구와 장면이 일치할 때 셔터를 누른다. 다시 말하면 사진가는 내면으로 먼저 본 장면을 촬영한다.
하늘의 구름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한 존재로 여겨진다. 구름의 모양을 만들거나 이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날그날의 운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이퀴벌런트 연작은 언뜻 보기에 매일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불규칙하고 우연적인 인생의 풍경처럼 보인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면 그 구름 사진에는 구름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사진에는 구름뿐만 아니라 사진작가의 생각과 욕망, 평안과 공포도 담겨 있다.
그렇게 스티글리츠의 구름 사진을 설명한 뒤, 그 남자는 이렇게 말했다. “구름 앞에서 인간이 무기력하다는 것은 사람들의 오해야. 왜냐하면 그 구름의 모양을 만들고 이동시킨 건 스티글리츠의 내면이거든. 그게 예술가가 하는 일이지. 이 현실이 마치 자신이 꾸는 꿈인 양 마음대로 만들어가는 것.”
그것은 그녀가 평생 기억하고 싶은 말이었다.
“며칠 뒤, 집으로 가는데 그 아저씨가 저를 불렀어요. 제 사진을 현상했다고 하더군요. 이제 사진을 인화할 텐데, 그 전에 볼 게 있다면서 제게 어떤 사진집 속의 한 사진을 보여줬어요. 그리고 제게 무슨 사진인 것 같냐고 묻더군요. ‘아기가 우네요.’ 제가 말했어요. ‘그래, 아기가 울고 있지. 하지만 울고 있지만은 않아.’ 우리는 암실로 들어갔지요. 암실 안은 희미한 붉은 불빛뿐이었죠. 문을 닫은 뒤부터 제 심장은 소리가 들린다 싶을 정도로 쿵쾅거렸어요. 다시 저는 좋은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지요. 그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저씨는 바이올린 연주곡을 틀어놓고 사진을 인화했죠. 필름을 넣어 빛에 노출시켰다가 어떤 용액에 담그니 인화지에 며칠 전 제 얼굴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 모습이 신기해 그때까지 긴장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어요. ‘어떠니? 똑같지 않니?’ 사진관 아저씨가 말했어요. 조금 전에 우리가 사진집에서 본 우는 아기와 제 표정이 똑같지 않느냐는 물음이었죠. ‘그렇네요. 똑같네요.’ 제가 말했죠. ‘그래, 바로 그거야. 너도 울고 있지만, 울고 있지만은 않아.’ 아저씨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죠. 그렇게 사진을 한 번 더 인화한 뒤, 잘 나온 것이라며 제게 그 사진을 선물로 줬어요. 암실로 들어가기 전에 함께 본 사진집과 함께. 저는 우는 아기가 있는 페이지에 제 사진을 넣었어요. 그리고 집으로 갔죠. 그 뒤로 나뭇잎이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아버지가 술을 끊기라도 했나요?”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인생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요.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것만은 아니에요. 그 뒤로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은 건 제가 힘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조금 뒤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었어요.”
“아하. 그렇군요.”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렇게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대개 술에 취해 있었고, 가끔 깨어 있었죠. 어떤 경우든 저는 제 앞의 현실에서 제 마음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거기에는 두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두려움만 있는 건 아니었어요. 저는 두려운 현실 앞에서 두려움이 아닌 것들을 발견해냈어요. 그렇게 상황은 조금씩 바뀌어갔죠. 아버지는 이제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요. 그때는 이런 미래를 전혀 상상할 수 없었지요. 다만 저는 그 말만 되뇌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스마트폰으로 그녀가 말한 사진을 검색했다.
“이 사진이 맞나요?”
내가 찾은 사진을 보여주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 속의 아기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울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 사진은 제 인생의 보물이에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저는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나뭇잎을 잡은 손에 힘을 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저라는 사실을. 조금 뒤의 세계가 좋을지 나쁠지를 결정하는 것도 저라는 사실을.”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기차는 광명을 지나고 있었다.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앞좌석 그물망에 꽂힌 <KTX매거진>을 봤다. 거기에는 ‘광화문’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처럼 푹 잠들었기 때문인지 몸이 개운했다. 대구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잠들었으니 1시간 30분은 족히 잠든 셈이었다. 자는 동안 별일은 없었나 싶어 스마트폰을 켰다. 그러자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Diane Arbus, A Child Crying, New Jersey, 1967’. 아기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울고 있지만은 않았다.
지난 몇 년간은 내게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악몽 같은 시간만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조금씩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기차는 불을 환하게 밝힌 빌딩 숲을 지나 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앞좌석의 아이가 다시 칭얼대기 시작했다. 종착역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