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수막 폐기물'을 세계에 나눠주고 7년 추적했던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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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늘 입버릇처럼 말한다. 예술은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알다시피 대개 공허한 구호에 그친다. 자신의 작품을 미사여구로 홍보해 몸값을 올리는 데만 몰두하는 작가들은 그나마 양반이다. 민중을 위한 예술을 내세우면서 자기 잇속을 챙기는 데만 골몰하는 사람, 여성을 위한 예술을 한다면서 뒤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환멸만 가중시킬 뿐이다.
정재철(1959~2020)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건, 그가 진심으로 예술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드문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젊은 유망 조각가로 잘 나가던 그는 어느날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홀연히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돈은 안 되지만 의미있는’ 일에 삶을 바쳤다. 예술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버려진 현수막으로 사랑과 평화를 표현한 ‘실크로드 프로젝트’,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블루오션 프로젝트’는 국내외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서울 회현동 금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끝나지 않는 여행’은 정 작가의 3주기에 대한 추모전이다. 정 작가가 생전 남긴 작품 다섯 점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들, 그를 사랑했던 동료와 선후배 25명이 전시에 참여했다. 전시는 정 작가의 연인이었던 황연주 작가의 기획으로 성사됐다.
30대 시절의 정 작가는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조각가 가운데 하나였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그는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김세중 청년조각상 등 조각계의 굵직한 상을 휩쓸며 나무 조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앙미술대전이 보내준 유럽 여행은 그의 인생이 바꿔놨다. 정 작가는 생각했다. ‘삶은 여행이고, 여행은 미술이다. 여행을 떠나자.’
2004년 3월 정 작가는 한국에서 수집한 폐현수막을 17개국 50여개 지역 현지인들에게 나눠준 뒤 현수막들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기록하는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 문화와 다른 문화와 어떻게 만나는지, 현대 사회에서 재활용이라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7년에 걸친 작업기간 동안 보습 학원과 대출 상품을 광고하던 현수막은 인도의 가정집 쿠션이 됐고, 중국 오지에 있는 과일 상점의 천막이 됐고, 파키스탄 청년의 가방이 됐다. 그 대부분은 현지에 두고 왔지만, 대신 전시장에서는 작가가 현수막으로 만든 파우치를 만날 수 있다. 2013년 황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선물한 파우치다.그 다음으로 정 작가가 시작한 게 블루오션 프로젝트다. 제주도를 비롯해 서해 앞바다 등 전국의 바닷가에서 해양 쓰레기를 모으고 환경 문제를 조명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를 이용해 조형물을 만들고 어느 앞바다에 어떤 쓰레기가 많이 떠다니는지를 그린 ‘한국 바다 쓰레기 지도’를 만들었다. 전시장에 나온 ‘제주일화도’(2019)는 그 대표작 중 하나로, 올해 광주비엔날레 병행전시에 나왔던 작품이다.
두 작업 모두 돈이 안 되는 데다 고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 작가는 고집스레 작업을 이어나갔다. 황 작가는 “정 작가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작가였다”며 “사명감을 갖고 작업해나가는 과정이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정재철 작가는 인간적인 면모가 진한 사람이었다. 소탈하면서도 매력적이어서, 미술계에서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출품작 가운데는 찻상이 하나 있는데 2014년 양평에서 이웃해 살던 신흥우 작가에게 직접 만들어 선물한 것이었다.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직접 미술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정 작가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았다. 25명에 달하는 그의 선후배, 제자 등이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을 내놓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강장원 작가가 출품한 ‘사물의 기억들’이 대표적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가를 돌며 수집한 유리와 에폭시수지 등을 재료로 ‘큰 그릇’이었던 정 작가를 추억하며 만든 그릇이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작품에 몰두하던 정 작가는 간염 치료 시기를 놓쳐 간암에 걸렸고, 2020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이랬다. “작품 잘 가지고 있어. 전시하자는 데가 있으면 다 내줘. 어쨌든 내 작품이 필요한 시대는 계속될 거니까.” 이번 전시는 오는 24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정재철(1959~2020)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흘렀는데도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은 건, 그가 진심으로 예술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드문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젊은 유망 조각가로 잘 나가던 그는 어느날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홀연히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돈은 안 되지만 의미있는’ 일에 삶을 바쳤다. 예술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버려진 현수막으로 사랑과 평화를 표현한 ‘실크로드 프로젝트’,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를 통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블루오션 프로젝트’는 국내외 미술계의 찬사를 받았다. 서울 회현동 금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끝나지 않는 여행’은 정 작가의 3주기에 대한 추모전이다. 정 작가가 생전 남긴 작품 다섯 점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알 수 있는 아카이브 자료들, 그를 사랑했던 동료와 선후배 25명이 전시에 참여했다. 전시는 정 작가의 연인이었던 황연주 작가의 기획으로 성사됐다.
30대 시절의 정 작가는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촉망받는 조각가 가운데 하나였다. 서울대 조소과를 나온 그는 중앙미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김세중 청년조각상 등 조각계의 굵직한 상을 휩쓸며 나무 조각으로 이름을 날렸다. 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앙미술대전이 보내준 유럽 여행은 그의 인생이 바꿔놨다. 정 작가는 생각했다. ‘삶은 여행이고, 여행은 미술이다. 여행을 떠나자.’
2004년 3월 정 작가는 한국에서 수집한 폐현수막을 17개국 50여개 지역 현지인들에게 나눠준 뒤 현수막들이 어떻게 사용됐는지를 기록하는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한 문화와 다른 문화와 어떻게 만나는지, 현대 사회에서 재활용이라는 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7년에 걸친 작업기간 동안 보습 학원과 대출 상품을 광고하던 현수막은 인도의 가정집 쿠션이 됐고, 중국 오지에 있는 과일 상점의 천막이 됐고, 파키스탄 청년의 가방이 됐다. 그 대부분은 현지에 두고 왔지만, 대신 전시장에서는 작가가 현수막으로 만든 파우치를 만날 수 있다. 2013년 황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 선물한 파우치다.그 다음으로 정 작가가 시작한 게 블루오션 프로젝트다. 제주도를 비롯해 서해 앞바다 등 전국의 바닷가에서 해양 쓰레기를 모으고 환경 문제를 조명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바다에서 주운 쓰레기를 이용해 조형물을 만들고 어느 앞바다에 어떤 쓰레기가 많이 떠다니는지를 그린 ‘한국 바다 쓰레기 지도’를 만들었다. 전시장에 나온 ‘제주일화도’(2019)는 그 대표작 중 하나로, 올해 광주비엔날레 병행전시에 나왔던 작품이다.
두 작업 모두 돈이 안 되는 데다 고행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정 작가는 고집스레 작업을 이어나갔다. 황 작가는 “정 작가는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믿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은 작가였다”며 “사명감을 갖고 작업해나가는 과정이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정재철 작가는 인간적인 면모가 진한 사람이었다. 소탈하면서도 매력적이어서, 미술계에서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출품작 가운데는 찻상이 하나 있는데 2014년 양평에서 이웃해 살던 신흥우 작가에게 직접 만들어 선물한 것이었다.많은 후배들이 그를 따랐다. 직접 미술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정 작가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았다. 25명에 달하는 그의 선후배, 제자 등이 이번 전시를 위해 작품을 내놓은 건 이런 이유에서다. 강장원 작가가 출품한 ‘사물의 기억들’이 대표적이다. 충청도와 전라도 해안가를 돌며 수집한 유리와 에폭시수지 등을 재료로 ‘큰 그릇’이었던 정 작가를 추억하며 만든 그릇이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작품에 몰두하던 정 작가는 간염 치료 시기를 놓쳐 간암에 걸렸고, 2020년 8월 세상을 떠났다. 유언은 이랬다. “작품 잘 가지고 있어. 전시하자는 데가 있으면 다 내줘. 어쨌든 내 작품이 필요한 시대는 계속될 거니까.” 이번 전시는 오는 24일까지 열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