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를 집어삼킨 귀신과 죽음 ... '악마의 노예'가 된 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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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납량특집] 에드바르 뭉크 '절규'에 얽힌 이야기
에드바르 뭉크 '불안', 1894
"마귀를 쫓으려면 더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것 같다. 오늘 밤에는 너희 중 그 누구도 잠들지 말아라."1868년, 에드바르 뭉크는 어머니를 잃었다. 고작 다섯 살의 일이었다. 다섯 남매의 둘째였던 뭉크는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엄마의 모습을 생생히 봤다. 엄마의 죽음 후,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정신이 빠진 듯 종교에 모든 것을 의탁했다. '광신도'가 된 것이다.
환자들을 수술한 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수술복을 벗지도 않은 채 아버지는 뭉크와 그의 누나, 그리고 여동생들을 불러모으는 일이 잦았다. 그리곤 아무 이유 없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때리면서 "기도하는 중에 내 아내를 보고 왔다"며 "너희들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엄마가 때리라고 시켰다"는 미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뭉크의 아버지는 밤마다 귀신, 죽음, 살인 등 공포스러운 내용이 가득한 책을 읽어준다며 남매들을 자지 못하게 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너희들은 매번 신의 뜻을 어기는 악마이기 때문에, 충격 요법을 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에드바르 뭉크 '죽음과 아이', 1899
뭉크는 그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한 손은 누나 소피에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여동생 라우라의 손을 잡아주며 공포에 질렸다. 그렇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귀신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평생 뭉크를 따라다니는 망령이 된다. 나중에 그는 "나는 아버지에게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하나는 병약함, 또 하나는 정신병이었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엄마의 죽음보다 뭉크를 미치게 한 건 바로 누나 소피에의 폐결핵으로 인한 사망이었다. 그 즈음 아버지의 폭력과 공포감을 이기지 못한 여동생 라우라는 완전히 미쳐버렸다. 혼자 웃다가 울고 침을 흘리며 바닥을 기어다녔다. 뭉크는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잃었다. 이후 뭉크는 줄곧 '이제 내가 죽을 차례'라는 생각을 하며 죽음을 향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다가 밤중 덜컥 일어나 내가 이미 죽어 지옥에 온 게 아닌가 생각하며 밤을 지새웠다. 1879년 오슬로의 기술대학에 진학한 뭉크는 특유의 병약함 때문에 학업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는 수업 중 쓰러지는 일이 잦았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뭉크, 그는 수시로 자살과 죽은 후의 지옥에 대해 생각했다.
불현듯 그는 펜을 잡았다. "낙서 하나는 봐줄만한 놈" 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는 드로잉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밀어냈다. 뭉크는 1년 만에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의 문턱을 넘었다. 천재의 탄생이었다. "삶은 고통이다"라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던 뭉크는 잠시 떠난 프랑스에서 고흐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노르웨이에 돌아온 그는 우울과 피폐함을 그리는 작가가 됐다. 그가 그린 ‘죽음과 아이'는 죽은 어머니 옆에서 무서움에 덜덜 떨던 동생 라우라를 회상하며 작업했다.
1892년 독일 베를린. 당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서 프랑스를 꺾은 독일은 온 국토가 축제의 장이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독일 미술협회는 뭉크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줬다. 55점의 그림이 벽에 걸렸다. 그의 전시회를 찾은 시민들은 '악령의 사주를 받은 그림'이라며 경악했다. 사람과 죽음, 폭력의 이미지를 그리는 뭉크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독일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지옥의 그림이다", "보는 것만으로 불길한 기운에 전염될 지 모르니, 관람에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성 문구가 신문에 실리기까지 했다. 단 8일 만에 뭉크의 개인전은 '뭉크 스캔들'이라는 이름만을 남긴 채 끝이 났다. 뭉크는 이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의 노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 일로 뭉크는 자기 자신조차도 두려울 만큼 유명한 화가가 됐다. "죽음을 그리는 해골 같은 화가가 베를린을 뒤집었다"는 소문이 퍼지며 팬클럽까지 생겨났다. 그의 명성은 고향 노르웨이를 거쳐 프랑스까지 퍼져나갔다.
뭉크는 어리둥절하는 대신 이 '지옥의 화가'라는 이름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바로 악마의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라며 스스로를 홍보했다. 인생 처음으로 자신만만한 기분을 느낀 뭉크는 그 다음 해 세기의 역작을 내놓는다. 누구나 아는 작품, '절규'.
에드바르 뭉크 '죽음과 아이', 1893
'절규'는 뭉크가 친구와 함께 고향 시골 마을에서 산책을 하며 겪은 경험을 되살려 그린 작품이다. 길을 걷다 갑자기 패닉이 온 뭉크는 엄마, 누나, 그리고 아버지가 만들어 낸 수많은 귀신과 악령에 시달렸다. 악령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해하려 하던 악몽과도 같은 순간을 캔버스 위에 쏟아냈다.
이 작품은 음침함을 넘어 세상에 충격을 줬다. 그가 가진 평생의 불행을 그린 작품이니 그럴 만도 했다. 기괴하고 아름다웠다. 이 작품을 내놓은 그의 나이는 갓 서른이었다. 뭉크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하나가 됐다. 유명해진 후에도 뭉크는 여전히 신과 세상이 두려웠다. 사람도 무서워했다. 사랑에도 세 번이나 실패했다. 그는 수염을 덥수룩히 길러 얼굴을 가리면 세상과 신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만날 땐 무조건 빛과 문이 없는 밀폐된 장소에서만 만났다.
정신병을 오래 앓던 여동생 라우라는 1926년 사망했다. 뭉크는 장례식에도 가지 않았다. 여동생의 죽음을 보면 예전의 트라우마가 다시 자신을 집어삼킬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는 여동생의 장례를 나무 뒤에서 도둑처럼 또는 저승사자처럼 훔쳐봤다. 뭉크는 당시 50세였던 유럽인들의 평균 수명을 훨씬 뛰어넘은 80세에 세상을 떴다. 70세에는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대십자 훈장까지 직접 받았다. 나치도 그의 악마스러운 그림에 감명을 받고 포섭하기 위해 몇 년을 공들였다. 물론 뭉크가 거절했지만.
뭉크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죽음과 망령의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그는 모든 것을 탈피한 현자처럼 세상 만물을 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주일에 두 번은 쓰러져 거품을 물던 뭉크는 장수했다. "불행에 너무 익숙해지니 악마도 그를 죽을 사람의 명단에서 지웠다"는 이야기가 들렸을 정도였다. 그가 1944년 죽음을 맞이할 때 한 손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책 <악령>을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나의 손을 쥐고 공포를 버텼던 5살의 그 자신처럼. 죽음 이후 그의 집에서는 유화, 실크스크린 등 2만여 점의 작품들이 쏟아졌다. 나치 정권이 언젠가 쳐들어 올 것을 피해 꽁꽁 숨겨놨던 작품들이었다. 사랑하는 아내도, 키워야 할 자식도 없었던 그는 그림을 자신이 잉태해 낳은 자식이라고 여겼다. 하나가 없어지거나 팔려나가면 똑같은 작품을 또 만들었다. 그의 악령 들린 작품은 인류의 선물이 됐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