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장 '300년 불문율' 깨지나...필립스의 '직거래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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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미술품 경매사' 필립스“옥션은 작가와 ‘직거래’를 하지 않는다.” 18세기 미술품 경매라는 업(業)이 생겨난 이후 이런 불문율은 계속 지켜져왔다. 작가를 발굴하고 키우는 갤러리의 노고, 미술시장 생태계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게 명분. 기업이 하기엔 너무 위험하고 돈이 안되는 일이라는 게 현실적인 이유였다. 갤러리스트로 성공하려면 자신의 안목을 믿고 도박에 가까운 기약 없는 투자를 감행해야 할 때가 많은데, 개인사업자라면 몰라도 직원을 거느린 기업이 먹거리로 삼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작가 작품 직거래 '드롭샵' 플랫폼 런칭
"어쩔 수 없는 시대 변화" 평가 속
미술시장 질적 저하 우려도
300년 가까이 지켜졌던 이 불문율이 최근 들어 깨지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1796년 설립돼 세계 3대 경매사 중 하나로 꼽히는 필립스옥션이 최근 ‘작가 직거래 장터’ 개설을 공식 발표한 건 이런 분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는 평가다.9일 아트뉴스와 아트넷 등 해외 미술전문매체에 따르면 필립스옥션은 작가와 구매자를 직접 연결하는 플랫폼 ‘Dropshop’(드롭샵)을 개설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필립스가 선택한 작가가 웹사이트를 통해 작품을 공개하면 고객들은 인터넷 쇼핑몰을 이용하듯 이를 구매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해 화랑들이 하던 일을 인터넷으로 옮겨 똑같이 하겠다는 얘기다.
이 플랫폼을 통해 첫번째로 작품을 판매하는 사람은 호주 작가 씨제이 헨드리다. 오는 8월 20일 자신의 작품과 조형물 에디션 100개의 판매를 개시할 계획이다.
미술계는 필립스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글로벌 주요 경매사가 “작가에게 직접 작품을 구입해 고객에게 넘기겠다”고 공식 선언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다. 이전에도 자선행사 등 이벤트 형식의 ‘직거래’가 종종 있었지만, 이런 식의 본격적인 직거래 진출 선언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아트뉴스페이퍼는 “갤러리와 옥션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고 평가했다.수백년간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결정적인 요인은 SNS의 발달이다. 예전에는 작가들이 화랑의 협조 없이 작품을 판매하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인스타그램 등 SNS가 발달하면서 작가들은 화랑에 소속되거나 기존 미술계에 편입되지 않고도 자신의 작품을 얼마든지 알리고 판매할 수 있게 됐다. 한 갤러리 대표는 “요즘 젊은 작가들 대부분은 인스타그램에서 스스로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며 “간혹 그 중에서는 ‘수수료를 내기 싫다’는 이유로 화랑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직접 고객들에게 작품을 판매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가 겹쳤다. 시중에 막대한 유동성이 풀리면서 미술시장이 급성장했고, SNS를 활발히 이용하는 20~30대를 중심으로 미술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고객이 급증했다. 이들은 기존 미술시장 질서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자유롭게 구입했다. 이로 인해 젊은 고객들과 작가들의 인식이 전과 완전히 바뀌었다는 게 미술계 설명이다.이를 눈여겨보던 경매사들 중 가장 먼저 직거래 시장에 뛰어든 건 필립스다. 당장 작가 입장에서는 경매사와 손잡아서 나쁠 게 없다. 경매사의 거대한 네트워크와 홍보 역량에 올라탈 수 있는 기회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이 자연스레 낳은 결과인 만큼, 막고 싶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흐름도 아니다. 미술계 관계자는 “앞으로 이런 흐름은 계속될 것”이라며 “경매사들이 거대 자본을 앞세워 작가와의 직거래에 뛰어들게 되면 화랑의 힘은 앞으로 계속 약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다만 이런 현상이 미술시장의 근간을 뒤흔들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자기PR을 잘하고 당장 돈이 되는 작가들만 빛을 보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지만 당장 돈이 안 되거나 자기PR 능력이 떨어지는 작가들은 더욱 소외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한 갤러리스트는 “작가가 화랑을 통해 작품을 판매하면 화랑이 50%의 수수료를 챙기지만 아무도 불만은 없다”며 “그만큼 작가를 발굴하고 키우는 게 힘든 데다 리스크가 높은 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무명 작가를 발굴하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때로는 작품 제작 방향에 대한 조언까지 하는 역할은 갤러리만 할 수 있다는 게 화랑들의 얘기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