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넘지 못한 거북이, 파리에게 굴복한 인간…'어른이'를 위한 37편의 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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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동화는 어린이를 위해 지은 이야기다. 아이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대부분 작품은 마법이나 상상의 생물 등 환상적인 존재에 빗대 삶의 교훈을 전달한다.
김종문 지음
꿈과 희망
344쪽│1만5000원
최근 출간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조금 다르다. 동화의 형식을 빌렸지만, 어디까지나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상처받고 자책하는 어른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37편의 단편을 엮었다. <뚜벅이 사랑>(2003) <숲에도 풀이 있었다>(2004) 등 소설을 펴낸 김종문 저자가 9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책은 기존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예를 들면 수록작 <토끼와 거북이>는 토끼의 나태함과 거북이의 꾸준한 노력을 대조하는 내용의 원래 이야기를 비틀었다. 김종문 저자의 세계관에서 거북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거북이의 좌절과 토끼의 오만함을 나란히 배치하며 사회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동물뿐만 아니라 공구, 주방용품 등 사무실에서 일상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요소들도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한다. <고등생명체>에선 지적 생명체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인간이 하등생명체인 파리에게 굴복한다. 녹이 슬어 활용 가치도 없으면서 날카로운 침을 가졌다는 이유로 다른 문구들을 깎아 내리는 압정의 이야기를 그린 <압정의 최후>도 주변에서 있을 법한 모습이다.
저자가 쓴 동화는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굳이 따지자면 현실을 꼬집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해학과 풍자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사회의 모습을 은근히 드러낸다. 저자는 "사람의 가치가 부와 지위, 성과 인종에 따라 달라질 수 없다. 살면서 상처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세상에 대한 독특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어른이'들을 위로하는 책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