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작품" 브람스가 극찬한 죽음의 소리…듣자마자 소름이 쫙

마스터피스

주세페 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

울부짖는 목소리
강렬한 음향에 압도

'죽음 후 심판의 날'
산 자에게 경고하듯
아내와 자녀 잃은
어두운 내면 표출
인간의 가장 원초적 공포는 죽음이다. 죽음과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오래전부터 음악가들은 죽음의 형상을 음표로 토해내며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다. 모차르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리며 최후 걸작 ‘레퀴엠’을, 슈베르트는 인생에서 끝없이 마주한 죽음을 바탕으로 ‘마왕’,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등을 남겼다. 차이콥스키가 작곡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교향곡 6번 ‘비창’도 죽음에 가까워진 그가 남긴 음악적 유서였다.

‘오페라의 거인’으로 불리는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도 죽음에 대한 영감으로 불멸의 대작을 써낸 인물 중 하나다. 그의 레퀴엠은 모차르트 작품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레퀴엠(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미사 음악)으로 꼽힌다. 특히 베르디 레퀴엠 중 ‘진노의 날(디에스 이레)’은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렬한 공포감을 전한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 격렬한 오케스트라 음향이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면 극한의 두려움에 처절하게 울부짖는 남녀의 목소리가 쏟아지며 청중을 압도한다. 마치 살아있는 이들에게 ‘죽음 이후 심판의 날이 올 테니 어떤 죄도 짓지 말라’고 경고하듯이.베르디의 레퀴엠은 우여곡절 끝에 세상의 빛을 본 작품이다. 베르디가 처음 레퀴엠을 구상한 건 1868년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에 베르디는 자신 몫인 레퀴엠의 마지막 악곡 ‘리베라 메’를 작곡했는데, 12명의 작곡가가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여러 문제로 결국 무산되고 만다.

베르디가 레퀴엠의 존재를 다시금 떠올린 건 그로부터 5년이 지난 때였다. 1873년 5월 22일 그가 가장 존경한 인물이자 이탈리아의 정신적 지주였던 대문호 알레산드로 만초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독한 슬픔과 충격에 빠진 그는 만초니를 추모하기 위해 레퀴엠을 다시 썼다. 이듬해 4월 완성된 베르디의 레퀴엠은 만초니 서거 1주기에 맞춰 밀라노 산 마르코 성당에서 초연됐다. 120여 명의 합창단과 110여 명의 관현악단, 당대 최고의 프리마돈나 테레사 스톨츠 등이 무대에 올라 선보이는 장대한 곡에 청중은 열광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 오스트리아 비엔나, 영국 런던 등 유럽 전역에서 잇따라 공연되며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를 갖춘 명작으로 인정받는다. 종교 음악에 이토록 많은 나라의 청중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각에선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다. 독일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베르디의 레퀴엠은 성직자 복장을 걸친 오페라”라고 혹평했다. 거대한 구성과 규모, 화려한 선율, 극적인 악상 표현 등 작품 특유의 음악적 요소는 베르디가 그간 써온 오페라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경건함을 중시하는 종교음악으로 규정하기엔 지나치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브람스는 이에 대해 “뷜로는 스스로 바보가 됐다. 이것은 천재의 작품”이라고 확언했다.베르디 레퀴엠을 대표하는 악곡은 단연 ‘진노의 날’이다. 일찍이 아내와 두 자녀를 병으로 잃은 베르디의 어두운 내면세계가 표출된 것으로 해석되는 이 악곡엔 인간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과 그에 대한 고찰이 표현돼 있다. 작품은 네 차례 같은 음을 세게 내려치는 팀파니와 관현악기로 문을 연다.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등 목관이 아주 빠르게 16분음표를 쏟아내면 테너·베이스 성악 성부가 등장해 아주 고통스럽게 “진노의 날”을 포효한다. 소프라노·알토 성악 성부까지 포개져 거대한 음량으로 심판에 대한 공포를 연출하고, 이어 현악이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팽팽한 구조도 그렇다. 성악 성부가 소리와 속도를 줄이며 불안감을 낮추려 할 때 되레 고음역의 관현악 선율이 더 가파르게 솟구치면서 대비되는 감정을 표현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악 성부가 “심판관이 오시는 날, 크나큰 공포가 오는 날. 모든 것을 엄히 다스리도다”라고 속삭이면 모든 악기의 울림도 옅어지며 막을 내린다. 마치 마지막 숨이 빠져나간, 온전한 죽음을 마주하듯이.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