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가 흐르지 않는 앞집엔 비명이…도끼맨의 예고대로였다 [오현우의 듣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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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사람1919년 3월 13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시의 지역 신문 타임스피카윤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자신을 ‘도끼맨(Axe-Man)’이라고 소개한 뒤 “18일 저녁 12시15분께 뉴올리언스를 찾아갈 것이다. 이때 재즈를 연주하면 살려주겠다”며 “재즈가 흘러나오는 곳에 있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다. 악마에게 맹세한다”고 썼다. 신원도 모르고 내용의 사실 여부도 밝혀지지 않은 협박이지만 뉴올리언스 시민은 공포에 떨었다.
피로 점철된 '죽음의 송가'
"재즈를 연주하는 자만 살아남는다"
1919년 美 신문사로 날아온 협박 편지
공포에 질린 주민들, 매일 재즈 들어
헝가리 작곡가가 만든 '글루미 선데이'
'죽음 부르는 노래' 소문에 한때 금지곡
당시 뉴올리언스에선 10개월 전부터 연쇄 살인 사건이 이어지고 있었다. 1918년 이탈리아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던 부부가 살해된 뒤 또 다른 식료품 매장 주인이 살해당했다. 수법은 비슷했다. 모두 도끼를 활용해 살인했다는 것. 뉴올리언스 전역에 도끼맨에 대한 공포가 확산했다.18일 밤이 되자 뉴올리언스의 모든 재즈바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재즈바가 없는 소규모 마을에선 재즈 파티를 벌였다. 재즈를 조금이라도 연주할 수 있는 주민이라면 누구라도 먼저 악기를 들고 밤새 재즈를 연주했다. 모두 도끼맨의 협박 편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기묘한 밤이 지나고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도끼맨이 약속을 지켰다고 여겼다. 하지만 도끼맨은 다시 흉기를 꺼내 들었다. 같은 해 8월부터 3개월간 5명이 숨졌다. 주민들은 혹시 자신의 마을에 도끼맨이 찾아올까 두려워 매일 재즈를 연주하고 들었다. 총 12명의 피해자가 나온 연쇄 살인은 같은 해 10월 멎었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사건은 미결로 남았다.재즈 작곡가 조셉 존 데이빌라는 이 사건에 대해 듣고 ‘기묘한 도끼맨의 재즈’란 곡을 발표한다. 3분 안팎의 짧은 피아노곡이다. 실제 사건의 전개와 달리 경쾌한 선율이 특징이다. 뉴올리언스 연쇄 살인 사건은 이 곡으로 인해 미국 전역에 알려졌다. 데이빌라도 이름을 알리며 유명 작곡가로 거듭났다.
10여 년이 흐른 뒤 유럽에선 ‘죽음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1933년 헝가리 작곡가 레죄 셰레시가 쓴 ‘글루미 선데이’ 이야기다. 이 노래를 듣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이 줄을 잇자 죽음의 송가라는 별칭이 붙었다. 1936년 헝가리 청년이 유서에 이 노래를 언급한 뒤 숨졌다. 이후 1930년대 동안 17건의 연쇄 자살 사건이 벌어졌다. 공통점은 모두 글루미 선데이 가사를 유서에 썼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1941년 이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비운의 재즈 디바’ 빌리 홀리데이가 편곡해 불렀다. 홀리데이가 부른 글루미 선데이는 현재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버전으로 알려져 있다. 어딘가 쓸쓸한 홀리데이의 음색과 처량한 선율이 유려하게 어우러져서다.하지만 홀리데이 때문에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비판이 일었다. 미국에서도 10여 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글루미 선데이와 연관된 내용을 유서에 담았다. 작곡가 셰레시조차 1968년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을 부르는 노래란 소식이 퍼지자 영국 BBC는 홀리데이의 글루미 선데이 방송을 금지했고, 미국 지역 방송국도 뒤따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BBC는 2002년이 돼서야 금지령을 해제했다.
글루미 선데이에 얽힌 속설은 사실일까. 전문가들은 죽음을 부르는 선율은 어디에도 없다고 결론 내렸다. 우울한 선율이 흘러나오지만 죽음과 연관성이 얕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멜 토메(1958년), 레이 찰스(1969년), 비요크(1999년) 등 후대 음악가들은 이 곡을 리메이크했지만 비슷한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다. 사실상 도시 괴담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이런 괴담들 뒤엔 노래 그 자체를 분석할 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을 봐야 한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다. 그 시대의 음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글루미 선데이를 들었던 것이지, 그 노래 때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게 아니란 것이다. 실제 미국에서 이 노래가 유행했을 땐 경제 대공황과 세계 2차대전에 대한 공포가 맞물린 시기였다.헝가리에서 ‘글루미 선데이’가 나온 1930~1938년에도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은 5만 명을 웃돌았다. 1960년대부터 20여 년간 헝가리에서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는 20명을 웃돌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자살률 세계 1위(OECD 가입국 중)라는 이 불명예스러운 기록은 이제 우리나라가 넘겨받았다. 지금 우리 곁엔 ‘제2의 글루미 선데이’가 없는데도 말이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