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과 ‘굴라재 활불 사건’ [고두현의 아침 시편]

굴라재 활불 사건
-만해시편
고두현

젊은 시절이었지.
만주 굴라재 고개 넘다
머리에 총 맞은 그날.독립군 후보생들이었어.
작은 키에 까까머리 나를
일본 밀정으로 오인했다는

그들이 무릎 꿇고 비는 동안
나도 빌었지. 마취 없이 수술받는 나보다
칼 쥔 손 먼저 기도해 달라고.

김동삼이라고 했던가. 맞아.
그의 손이 자꾸 떨리는 걸 보았어.
뒷걸음치는 흰 소의 눈망울 같았지.수술 마친 그가 낮게 외쳤어.
활불(活佛)일세! 그러나 이후
나는 평생 고개 흔드는 체머리로 살아야 했지.

서대문형무소에서 그가 죽은 날
북정 고개 넘어 싣고 와서는
내 방에 모시고 오일장을 치렀지.

일생에 딱 한 번 그때 울었어.
그는 쉰아홉, 나는 쉰여덟.
광복 8년 전이었지.지금 생각하니
죽어서 더 오래 산
그가 진짜 활불이었어.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한 땀씩 그가 내 머리에 새겨놓은
만주의 햇살이 그립기도 해.

그땐 젊어서
마취 없이도 세상 견딜 만했지.
하루하루가 활불이었어. 그때 우리는.---------------------------------------

오늘은 좀 특별한 날입니다. 면구스럽지만, 제가 ‘제21회 유심작품상’을 받는 날입니다. 수상작은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입니다. 시상식은 오후 5시 강원도 인제 ‘만해마을’에서 열립니다. 유심작품상은 만해 한용운이 창간한 잡지 ‘유심’의 이름을 따서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문학상이죠.

오늘 수상소감에서 저는 만해의 ‘굴라재 활불(活佛) 사건’을 예로 들며 “서늘하면서도 뜨겁게, 겸허한 자세로 문학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수상작은 언젠가 따로 소개하기로 하고, 오늘은 ‘굴라재 활불 사건’을 먼저 배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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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통보를 받고 ‘굴라재 활불 사건’을 먼저 떠올렸습니다. 만해는 서른두 살 때 만주 굴라재 고개에서 독립군 후보생들에게 일본 첩자로 오인되어 총격을 당했지요. 일제강점기 ‘관솔불 켜고 천하 대사를 통론하며 한편으로 화승총에 조련을’ 하던 그때, 조선 청년들이 그를 정탐꾼으로 오해해서 3발의 총탄을 쏘았습니다.

만해는 ‘생에서 사로 넘어가는 순간 온몸이 지극히 편안한 것 같았고 그 편안한 것까지도 감각을 못하게’ 될 정도로 죽음의 벼랑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총알이 머리에 박힌 상황에서 마취 없이 수술을 받았습니다. 생살을 째고 탄환을 빼내는 수술 중 앓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견디는 그를 보고 당시 치료를 맡은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활불(活佛, 살아 있는 부처)이야, 활불!” 하며 감탄했다고 하지요.

그에게 총을 쏜 청년들이 잘못된 걸 알고 찾아와 사죄했을 때는 오히려 그들의 기개를 치하하며 만주 지역 동포 교육에 더욱 힘쓰라고 격려했습니다.

엄혹한 시절, 총상 입은 몸에 수술칼을 들이대는 ‘뜨거운 고통’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의연함과 자신을 죽이려 했던 청년들을 되레 칭찬하는 ‘서늘한 숭고’의 경지!

이 두 가지 모습을 한 데 아울러 ‘서늘한 뜨거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총상 후유증으로 평생 머리를 흔드는 ‘체머리’를 앓으면서도 문학과 독립, 구도의 여정에 매진한 그의 삶 전체가 서늘하고 뜨겁게 다가옵니다.

서울 성북동 산기슭 222의 1번지, 일부러 햇볕이 덜 드는 북향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이름 지은 것에도 서늘함과 뜨거움이 동시에 겹칩니다. 심우장은 ‘소를 찾는 집’이니 곧 ‘잃어버린 나’를 찾는 깨달음의 과정이지요. 그의 필명 ‘실우(失牛, 소를 잃어버리다)’와 ‘목부(牧夫, 소를 키우다)’도 ‘나’를 찾는 길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런 수행과 인간 본성 탐구 과정을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 작업이라고 표현했지요. 또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며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이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고 했습니다.

그의 공부는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의 서늘함과 ‘그칠 줄 모르고 타는 가슴’의 뜨거움을 넘나들며 지금도 수많은 이의 밤을 밝히는 심지가 되어 타오르고 있습니다.그는 궁극적으로 시의 근본이 무엇이며, 시인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일깨워주었습니다. 그 ‘푸른 산빛’의 가르침을 거울삼아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시의 길을 오래 천천히, 겸허한 자세로 걸어가겠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