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개발한 비극적 천재의 삶과 고뇌…영화 '오펜하이머'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 신작…핵폭발 시험 '제로 CG'로 재현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천재 물리학자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 지어진 거대한 연구단지에서 진행됐다.

이곳에 모인 뛰어난 과학자들의 연구를 오펜하이머가 이끌었다.

이들은 1945년 핵폭발 시험에 성공했고, 미국이 개발한 원자폭탄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돼 종전을 앞당겼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원자폭탄의 가공할 파괴력이 초래한 참상을 본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에 부정적이었고,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던 1950년대엔 소련의 스파이란 의혹에 휘말렸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신작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극적인 오펜하이머의 삶을 그린 영화다. 이 작품은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의 오펜하이머 전기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토대로 했다.

이 영화는 오펜하이머와 그에게 적대적이던 미국 원자력에너지위원회 창립 위원 루이스 스트로스의 증언을 통해 오펜하이머의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오펜하이머가 회고한 이야기는 컬러 영상으로, 스트로스의 회고는 흑백 영상으로 펼쳐진다. 젊은 시절의 오펜하이머는 수학을 못 하는 '열등생'이면서도 우주의 꿈을 꾸는 물리학도로 그려진다.

그가 꿈을 꿀 땐 신비로운 우주의 영상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오펜하이머는 물리학뿐 아니라 엘리엇의 시, 피카소의 그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으로 정신세계를 넓혀간다.

사회 문제도 외면하지 않은 오펜하이머는 스페인 내전에 관심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들과도 교류한다.

그러나 우주의 비밀에 다가간 오펜하이머는 인간 세계의 정치에선 무력한 존재다.

"천재라고 해서 다 지혜로운 건 아니지"라는 이 영화의 대사처럼 말이다.

오펜하이머가 개발한 원자폭탄도 탄생하자마자 그의 손을 떠나 정치인들에게 넘겨진다.

오펜하이머는 독일의 나치가 원자폭탄 개발에 먼저 성공해선 안 된다는 절박함으로 맨해튼 프로젝트에 뛰어들지만, 그가 핵실험에 성공한 건 나치가 이미 항복한 때였다.

그는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로 종전이 앞당겨진 데 위안을 얻지만, 미국은 원자폭탄을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 활용할 준비에 들어간다.
오펜하이머가 정치의 장에서 무력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건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끊임없이 어긋난다.

트루먼 대통령은 대화 말미에 "사람들은 누가 원자폭탄을 만들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투하 명령을 내렸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투하 명령을 내린 건 바로 나다"라며 충고라도 하듯이 말한다.

이렇게 오펜하이머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우주의 비밀을 캐냈다가 몰락하고 마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신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줬다가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된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꺼내고, 오펜하이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비춘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깊은 고뇌를 조명한다.

핵실험이 성공한 순간, 그는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구절을 읊는다.

성조기를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 앞에 선 그는 핵폭발로 이들의 살이 열기에 타는 환영(幻影)에 빠져든다.

'오펜하이머'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로스앨러모스의 핵실험 장면일 것이다.

밤하늘에 거대한 버섯 모양의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멀리서 고글을 끼고 바닥에 엎드려 관찰한다.

천둥이 칠 때처럼 섬광이 이들에게 먼저 도착하고, 곧이어 거대한 파괴음이 울린다.

다만, 영화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를 보여주진 않는다.

컴퓨터그래픽(CG)을 최소화해 사실감을 극대화하는 연출을 고집해온 놀런 감독은 이번 작품을 '제로 CG'로 완성했다고 한다.

로스앨러모스 연구단지도 1940년대 모습 그대로 재현했다.

놀런 감독의 전작 '인터스텔라'(2014)처럼 '오펜하이머'도 양자물리학과 같은 과학 지식을 끊임없이 풀어낸다.

그러나 관객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기보다는 흥미를 더한다.

'덩케르크'(2017)를 포함한 놀런 감독의 다수 작품에 출연해 그의 '페르소나'로 통하는 킬리언 머피는 이번 작품에서 오펜하이머 역을 맡아 관객의 기억에 오래 남을 만한 연기를 펼친다.

중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손에 든 그는 외형적으로도 오펜하이머의 느낌을 최대한 살렸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군인 레슬리 그로브스를 연기한 맷 데이먼, 오펜하이머의 부인 키티 역의 에밀리 블런트,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오펜하이머의 연인 진 태트록 역의 플로렌스 퓨 등 캐스팅도 화려하다. 15일 개봉. 180분. 15세 관람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