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시대, 몰입형 쇼의 한계 또는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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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몰입형 쇼는 주로 프로젝션과 사운드스케이프, 때때로 가상 또는 증강현실과 같은 장비 외에 기술을 사용해 친숙한 예술 작품에 빛과 색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더해 감정이 아닌 감각을 자극해 관객을 유인한다. 여운이 남는 감동과 환상이 아닌, 순간의 환각을 제공해 찰나적 쾌락을 느끼게 한다. 대부분 관객은 크고 텅 빈 방의 바닥에 서거나 바닥에 앉아 작가의 작품(?) 또는 일련의 영상이 주위의 벽, 바닥, 천장에 투사되면서 문자 그대로 그 작품 속에 들어가 앉게 된다. 별들은 하늘에서 깜빡이고, 물의 붓놀림은 우아하게 흐르고, 이전에는 정적이었던 물레방아가 돌아가면서 당시 예술가가 보고 있던 세계에 자신도 함께 발을 들인 느낌이다. 따라서 전시의 인기는 높고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미술을 소개한다고 찬사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몰입형 쇼는 관객을 제품의 "사용자"처럼 다루며 “즐겁고 대립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상호작용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통적인 미술관이나 박물관까지 이런 몰입형 쇼에 동원되면서 미술관이 교육의 장소가 되기보다는 “모든 것이 ‘콘텐츠’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하면서 모든 문화적 공간이 ‘경험’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관객과의 친근함은 해롭다. 왜냐면 몰입형 쇼는 관객들 자신이 몰입했던 안락한 영역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엄혹한 현실에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이다.이렇듯 몰입형 쇼는 예술이란 용어를 차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현재에만 존재한다. 쇼는 정적인 미술 작품을 공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에 그 안에 있는 관객만 독특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 특정 사례(Instance)는 영원히 끝난다. 같은 사람이 같은 쇼를 다시 본다고 해도 그들의 경험, 그들이 주목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느끼는 방식은 그때그때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따라서 몰입형 쇼의 한계는 분명하다. 이미지로 소비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작품을 비맥락화 하며, 교육적 가치를 제거함으로써 예술가들의 작품을 하찮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가장 큰 비판은 몰입형 쇼가 작가보다 관람객에게 초점을 맞추어 예술에 대한 피상적인 참여–아마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무언가 자신을 과시하거나 드러내기 위해 쇼를 방문하는 것-를 유도한다는 점이다. 물론 몰입형 경험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사회가 점점 더 자아에 집착하고 있다는 만연된 느낌도 아니다. 오감에 더 강렬한 참여를 제공하는 다른 몰입형 경험과 비교할 때 프로젝터가 있는 방에 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평범해 보일 수도 있다.
쇼의 경험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비판은 몰입형 영상의 투사가 작가와 작품의 역사에서 탈맥락화된다는 것이다. 그림의 주제, 사용된 기법, 심지어 재료까지 모두 각 작가와 작품의 동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그 작품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재구성 또는 현대화하는 것은 대중적인 문화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 이외에 본래의 의미와 완전분리된 별개의 것이다.쇼에 관객이 몰리는 것은 반 고흐의 작품을 감상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했기 때문도 아니다. 작가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보여지기를 원하는 방식과 완전히 동떨어진 몰입형 경험은 프레젠테이션 순간 그 전시실에 있는 시청자들의 안구를 위한, 시 지각적 만족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몰입형 쇼는 과거로부터의 분리 이상으로 미래를 위해 보존되지는 않는 작품(?)이다. 경험의 내용을 작품으로 구성하는 작가의 경우 작품이 여러 세대에 걸쳐 어떻게 감동을 주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프로젝션 쇼는 같은 방식으로 미래 세대를 위해 남을 수 없다. 몰입형 쇼는 현재의 만족을 위해 잠시 존재하고 짐을 싸서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마치 장돌뱅이가 새로운 손님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듯.
그렇다면 무엇이 관객을 새로운 몰입형 전시로 끌어들이는 것일까. 이는 지금 우리가 자기애(Self love)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애란 “지나치게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자존감을 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의 이미지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속 아름답고 허영심 많은 나르키소스(Narcissus)라는 인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트는 처음 병리학적으로 자기애를 재해석했다. 그후 1970년 대 미국 사회학자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1932~94)는 나르시시즘을 문화적 규범으로 바꿔 20세기 초 사회를 특징짓는 개인숭배와 개인적 성공, 돈에 대한 광적 노이로제(Neurosis)와 정서적 과잉(Hysteria)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초연결사회인 21세기 지금, 세계는 훨씬 더 나르시시즘(Narcissism)적이라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오늘날 자기애 문화가 팽배하면서 정치가나 연예인의 경우 실제보다는 대중매체 또는 SNS를 통해 드러나는 이미지가 더 중요해진다. 트럼프 현상이 그런 예이다. ‘이미지정치’가 일반화되어 정치의 연예인(Celebrity)화로, 정치는 열성적 지지자인 팬덤(Fandom)현상으로 이어진다. 자기애에 충실한 이들은 오직 자기에게 몰두한다. 이들은 강한 신념 아래 절대 불변의 것이 있다고 믿으며 이를 추구한다. 다른 이의 관점은 무시하고 단순하게 자신이 보고 듣는 것 외에는 믿지 않는 광신도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강하고 유명한 이에게 자신을 투영해 그들에게 인정받고 그들에 의해 자신을 유지하며 이를 통해 고조되는 자존심을 획득”해 우월감을 느끼지만, 실제 자기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공허하다. 그래서 자신은 실제로는 “전반적으로 무능”하다고 느낀다. 또 자기애자는 패배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승자를 존경하고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에는 강한 질투심이 섞여 있어 그 존경과 애착이 자기 기대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나면 존경은 증오로 바뀐다.인간관계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만성적 공허함과 권태를 느낀다. “교묘하고 착취적으로 개인 관계에 접근하면서도 감정적인 의존은 두려워한다. 관계는 무의미하고 피상적이며 매우 불만족스럽다.” 혼자 있긴 싫지만 딱히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다. 이런 모순과 역설로 마음이 편치 못하다. 외롭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사귀면서 친한 관계가 되는 과정은 부담스럽다. 그래서 “아무것도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관계”를 원한다. 그래서 자기애자들은 인공적 환상 속에서 산다. 불행한 사람은 없는 모두가 스타가 되는 인스타그램 속 세상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착하고 똑똑하고 예쁜 크리에이터만 있는 유튜브는 천국이다.
건전한 사회적 권위마저 사라진 사회는 경쟁적인 삶의 조건, 사회적 질서의 진부함,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내면의 공허함, 무기력감이 팽배해지면서 현실에서는 소극적이며, 어려운 일로부터는 도피한다. 타인과의 조화보다는 개인의 우월함을 중시하는 자기애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후기 산업사회의 주된 특성이자 자기중심적 시대의 결과물이다.
만연한 소비주의, 소셜 미디어에서 자기 홍보, 어떤 희생에도 불구하고 명성을 추구하는 것만 봐도 오늘이 자기애의 시대라는 것을 보여준다. 21세기 청소년들은 “거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더 불행하다.” 왜냐면 이들은 이기적이고 공감하지 못하며 때로는 다소 과시적인 행동으로, 관심의 중심이 되고 싶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자신의 실수나 거짓말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실제로 자존감은 낮지만,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하며, 노력하지 않고도 많은 성공을 이루기”를 원한다.특히 1980년에서 1997년 사이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 유명하거나 유명하지 않은 사람들이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바꾸는 참신한 도구인 소셜 미디어, 매일 8천만 장의 사진이 올라온다는 인스타그램, 사진에 달리는 35억 개 이상의 ‘좋아요’, 수백만 명의 사용자가 자신의 일상을 전 세계에 공개하는 페이스 북, 이렇듯 SNS와 인터넷은 우리를 수동적인 관중이 아니라 자기애로 가득한 나르시시스트로 만든다. 그리고 몰입형 쑈는 그 틀 안에서 관객이 고민과 사색 또는 성찰없이 자기애에 빠져들게 한다는 점에서 중독성이 있다.
최근 사람들은 새롭게 유행하는 전원생활(Cottagecore), 틱톡(TikTok)으로 대중화된 이걸과 이보이(e-girls and boys)와 같은 새로운 유행에 맞게 스타일을 바꾼다. 이렇게 인터넷은 사람들을 정의된 상자 또는 어항 속에 집어넣고 그 안에 자신을 배치해 타인이 쉽게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자신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하는 유행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애자는 자신의 “자아”와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고 발견하기 위해 계속해서 꾸준하게 만나지 않고 연결만 되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간다.
나르시시스트가 주변에서 소외되지 않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몰입형 쇼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이런 쇼가 대중화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그들은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된 상태다. 공간의 6면을 투사하는 거대한 빛의 환각에 둘러싸인 나르시시스트는 문자 그대로 예술 작품의 일부가 된다. 전시회는 작품을 보는 주체가 없다면 몰입이 불가하다. 실제로 나르시시스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반영된 자신의 일부를 보는 데 능숙치 않다면 몰입형 쇼는 매력적이거나 성공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예술이 무엇인지 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선입견에 도전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몰입형 쇼는 자신의 안에 있는 나르시시즘을 수용할 뿐이다.비평가들은 이런 쇼가 엄청난 인기와 수익성으로 이어지고, 이는 전통적인 전시 공간이 트렌드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한다고 주장한다. 또 몰입형 쇼를 두고 많은 비평가는 이런 경험이 너무 선정적이고, 과거와 미래로부터 탈맥락화하고, 관람자가 예술의 교육적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전통 예술을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술과 기술은 계속해서 함께 성장할 것이며 이 혁신은 중요하며 억눌러서도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관심의 중심은 예술을 즐기는 전제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예술은 관객에게 도전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분관을 개관하면서 몰입형 쇼의 위세를 과시하던 캐나다 토론토에 본사를 둔 “Lighthouse Immersive Inc.”가 2023년 7월 28일 델라웨어에서 계열사들과 함께 법적으로 파산 절차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보스턴, 시카고, 클리블랜드, 콜럼버스, 덴버, 디트로이트, 캔자스시티, 라스베이거스, 미니애폴리스, 내슈빌, 샌안토니오, 토론토에 라이트하우스의 상설공연장이 있었다. 그들은 북미 21개 도시에서 70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9월까지 라이트하우스는 상설공연장의 4분의 3을 폐쇄할 계획이다. 파산의 원인은 티켓 판매 부진으로 알려졌다. 2019년 설립된 회사의 재정 불균형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파트너사인 임팩트뮤지엄스(주)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라이트하우스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세 곳에서 전시회가 금지되었고, 판매했던 150만 장의 티켓을 환불했다. 라이트하우스는 임팩트뮤지엄스(주)에 총 1,660만 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승승장구하던 이들이 파산한 것을 보면 물리적으로 고가의 작품을 포함하는 전통적인 미술 전시회에 비해 낮은 보험료와 운송비 등으로 쉽게 복제할 수 있는 쇼가 스스로 수많은 모방작을 낳았고, 이로 인해 지난 2년 동안 사랑받았던 소위 “몰입형 디지털 프로젝션”에 대한 시장의 공급과잉과 수요감소가 원인이다. “벽면 크기의 화면보호기(Screensaver)” 같은 움직이는 별들이 벽을 채우고, 흑백 영상이 칼라로 채워지는 몰입형 쇼는 19세기에 등장했던 산책로 또는 관광명소, 방 탈출 게임장, 밀랍 인형 박물관, 유령의 집, 파노라마 처럼 왜곡된 거울이 있어 관객의 몸을 별이 빛나는 밤처럼 소용돌이치는 유령의 캔버스로 바꾸는 눈속임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라이트하우스가 북미 21개 도시에 몰입형 쇼를 상영하는 극장을 운영하는 대형회사임에도 불구하고 파산했다는 것은 역시 예술을 표방한 기술임이 밝혀지고 제목과 작가와 작품은 다르지만 차별화되지 않은 스토리 라인과 이미지 구성이 관객들에게는 식상 또는 진부하거나 그것이 그것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알려진 바에 의하면 페이스 화랑의 마크 글림처(Marc Glimcher,1963~ )가 2020년 야심 차게 출시했던 체험적이고 몰입적인 상업 예술 벤처인 슈퍼블루(Superblue)도 불과 2년 만인 2022년 수백만 달러의 투자자금을 소진하고 런던에서 운영을 중단했다는 소식이다. 몰입형 쇼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엄혹한 현실의 빛이 더 강해 눈이 부셔서 한동안 앞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순간’은 ‘영원’을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