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 시대, 몰입형 쇼의 한계 또는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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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

이렇게 몰입형 쇼는 관객을 제품의 "사용자"처럼 다루며 “즐겁고 대립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 상호작용을 강조하면서 그들을 충족시킨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전통적인 미술관이나 박물관까지 이런 몰입형 쇼에 동원되면서 미술관이 교육의 장소가 되기보다는 “모든 것이 ‘콘텐츠’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하면서 모든 문화적 공간이 ‘경험’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관객과의 친근함은 해롭다. 왜냐면 몰입형 쇼는 관객들 자신이 몰입했던 안락한 영역 밖으로 나가는 순간 엄혹한 현실에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이다.이렇듯 몰입형 쇼는 예술이란 용어를 차용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현재에만 존재한다. 쇼는 정적인 미술 작품을 공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확한 순간에 그 안에 있는 관객만 독특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 특정 사례(Instance)는 영원히 끝난다. 같은 사람이 같은 쇼를 다시 본다고 해도 그들의 경험, 그들이 주목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느끼는 방식은 그때그때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쇼의 경험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비판은 몰입형 영상의 투사가 작가와 작품의 역사에서 탈맥락화된다는 것이다. 그림의 주제, 사용된 기법, 심지어 재료까지 모두 각 작가와 작품의 동시대 상황의 산물이다. 그 작품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재구성 또는 현대화하는 것은 대중적인 문화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 이외에 본래의 의미와 완전분리된 별개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관객을 새로운 몰입형 전시로 끌어들이는 것일까. 이는 지금 우리가 자기애(Self love)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자기애란 “지나치게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자존감을 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신의 이미지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속 아름답고 허영심 많은 나르키소스(Narcissus)라는 인물에서 시작되었다. 프로이트는 처음 병리학적으로 자기애를 재해석했다. 그후 1970년 대 미국 사회학자 크리스토퍼 라쉬(Christopher Lasch,1932~94)는 나르시시즘을 문화적 규범으로 바꿔 20세기 초 사회를 특징짓는 개인숭배와 개인적 성공, 돈에 대한 광적 노이로제(Neurosis)와 정서적 과잉(Hysteria)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연결된 초연결사회인 21세기 지금, 세계는 훨씬 더 나르시시즘(Narcissism)적이라는 이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건전한 사회적 권위마저 사라진 사회는 경쟁적인 삶의 조건, 사회적 질서의 진부함,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내면의 공허함, 무기력감이 팽배해지면서 현실에서는 소극적이며, 어려운 일로부터는 도피한다. 타인과의 조화보다는 개인의 우월함을 중시하는 자기애는 개인주의가 팽배한 후기 산업사회의 주된 특성이자 자기중심적 시대의 결과물이다.
만연한 소비주의, 소셜 미디어에서 자기 홍보, 어떤 희생에도 불구하고 명성을 추구하는 것만 봐도 오늘이 자기애의 시대라는 것을 보여준다. 21세기 청소년들은 “거의 모든 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더 불행하다.” 왜냐면 이들은 이기적이고 공감하지 못하며 때로는 다소 과시적인 행동으로, 관심의 중심이 되고 싶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자신의 실수나 거짓말을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실제로 자존감은 낮지만,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하는 일보다 이미지가 더 중요하며, 노력하지 않고도 많은 성공을 이루기”를 원한다.
최근 사람들은 새롭게 유행하는 전원생활(Cottagecore), 틱톡(TikTok)으로 대중화된 이걸과 이보이(e-girls and boys)와 같은 새로운 유행에 맞게 스타일을 바꾼다. 이렇게 인터넷은 사람들을 정의된 상자 또는 어항 속에 집어넣고 그 안에 자신을 배치해 타인이 쉽게 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자신도 스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하는 유행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애자는 자신의 “자아”와 새로운 연결을 시도하고 발견하기 위해 계속해서 꾸준하게 만나지 않고 연결만 되는 새로운 대상을 찾아간다.
나르시시스트가 주변에서 소외되지 않은 자신을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몰입형 쇼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이런 쇼가 대중화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면서 그들은 낯선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실제로는 고립된 상태다. 공간의 6면을 투사하는 거대한 빛의 환각에 둘러싸인 나르시시스트는 문자 그대로 예술 작품의 일부가 된다. 전시회는 작품을 보는 주체가 없다면 몰입이 불가하다. 실제로 나르시시스트가 주변 사람들에게 반영된 자신의 일부를 보는 데 능숙치 않다면 몰입형 쇼는 매력적이거나 성공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예술이 무엇인지 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선입견에 도전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몰입형 쇼는 자신의 안에 있는 나르시시즘을 수용할 뿐이다.
그런데 전 세계에 분관을 개관하면서 몰입형 쇼의 위세를 과시하던 캐나다 토론토에 본사를 둔 “Lighthouse Immersive Inc.”가 2023년 7월 28일 델라웨어에서 계열사들과 함께 법적으로 파산 절차에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보스턴, 시카고, 클리블랜드, 콜럼버스, 덴버, 디트로이트, 캔자스시티, 라스베이거스, 미니애폴리스, 내슈빌, 샌안토니오, 토론토에 라이트하우스의 상설공연장이 있었다. 그들은 북미 21개 도시에서 70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했다고 자랑했다. 하지만 9월까지 라이트하우스는 상설공연장의 4분의 3을 폐쇄할 계획이다. 파산의 원인은 티켓 판매 부진으로 알려졌다. 2019년 설립된 회사의 재정 불균형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파트너사인 임팩트뮤지엄스(주)에도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라이트하우스는 임대료를 내지 못해 세 곳에서 전시회가 금지되었고, 판매했던 150만 장의 티켓을 환불했다. 라이트하우스는 임팩트뮤지엄스(주)에 총 1,660만 달러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
실제 라이트하우스가 북미 21개 도시에 몰입형 쇼를 상영하는 극장을 운영하는 대형회사임에도 불구하고 파산했다는 것은 역시 예술을 표방한 기술임이 밝혀지고 제목과 작가와 작품은 다르지만 차별화되지 않은 스토리 라인과 이미지 구성이 관객들에게는 식상 또는 진부하거나 그것이 그것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알려진 바에 의하면 페이스 화랑의 마크 글림처(Marc Glimcher,1963~ )가 2020년 야심 차게 출시했던 체험적이고 몰입적인 상업 예술 벤처인 슈퍼블루(Superblue)도 불과 2년 만인 2022년 수백만 달러의 투자자금을 소진하고 런던에서 운영을 중단했다는 소식이다. 몰입형 쇼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면 엄혹한 현실의 빛이 더 강해 눈이 부셔서 한동안 앞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순간’은 ‘영원’을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