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대숙청' 집행자의 참회…피해자는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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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클래식 애호가라면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회고록 <증언>이나 이를 바탕으로 창작한 소설 등을 통해 1930년대 구(舊)소련 시절 스탈린 정권의 ‘피의 대숙청’ 관련 이야기를 접했을 것이다.
1930년대 '스탈린 공포정치' 정면 다뤄
유리 보리소프 '용서 구하는 여정' 호연
스탈린은 1936년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던 도중 자리를 뜬다. 뒤이어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이 오페라를 ‘형식주의’로 비판하는 글이 실리고, 쇼스타코비치는 멀지 않아 숙청 당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집에 들이닥친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에 급작스럽게 끌려갈 것이란 공포에 사로잡힌다. 오는 23일 개봉하는 러시아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Captain Volkonogov Escaped)의 시공간적 배경은 ‘피의 대숙청’이 절정으로 치닫던 1938년,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 이은 제2의 도시였던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다. 주요 무대는 ‘피의 대숙청’을 집행하던 엔카베데의 본거지다. 영화 제목에 등장하는 볼코노고프 대위(유리 보리소프)는 엔카베데의 자신감 넘치고 늠름한 경찰관이다. 러시아 부부 감독인 나타샤 메르쿨로바와 알렉세이 추포프가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도 같이 했다.볼코노고프는 어느 날 그의 동료 중 한명이 ‘재평가’ 소환을 앞두고 창문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는 것을 목격한다. 동료 경찰관들이 고문과 즉결 처형 및 신속한 매장을 의미하는 ‘재가’를 받기 위해 잇달아 소환되는 것을 보고들은 볼코노코프는 즉시 도망친다.
재평가 받은 동료들이 신속하게 함께 매장된 집단 무덤에 간 그는 절친했던 동료 베레테니코프(니키타 쿠쿠슈킨)의 환영을 본다. 친구는 볼코노코프에게 그가 참회하고, 적어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라도 진심 어린 용서를 해준다면 지옥의 영원한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으로 받아들여질 기회가 있다고 말한다.볼코노고프는 이후 직속 상관 골로비나 소령(티모페이 트리분체프)과 옛 동료들의 무자비한 추격을 피해가며 그가 숙청을 집행한 피해자들의 부모나 아내, 자식 등 유가족들을 찾아다닌다. 그들에게 피해자들이 어떻게 날조된 혐의로 자백을 강요당했고, 죽음을 맞았는지 사실을 털어놓고는 용서를 청한다.
‘피의 대숙청’에 대해 잘 모른다면, 조금은 예습을 하고 영화를 보는 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1933년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공공연하게 소련을 제압하고 정복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극도의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영화에서는 ‘조국의 적’이라고 표현되는 ‘내부의 적’을 먼저 제거하기로 하고 ‘피의 대숙청’을 시작한다. 숙청을 실행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엔카베데가 지목한 사람들은 재판이나 별다른 절차 없이 끌려가서 수용소에 갇히거나 밀실로 끌고가 뒷덜미에 총알을 맞고 죽임을 당했다.영화는 1930년대 대숙청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레닌그라드의 황량한 거리 풍경과 사람들, 위압적인 엔카베데 본거지의 모습 등을 그럴듯하게 재현한다. 특히 엔카베데에서 '미샤 삼촌'(이고르 사보치킨)이 부하들에게 총알 낭비 없이 오직 단 한 발로 숙청자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실습 장면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지금까지도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피로 얼룩진 역사인 '피의 대숙청'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가치는 더 빛난다. 이 영화는 2021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본선 경쟁부문에 올라 수상엔 실패했지만 큰 호평을 받았다. 다만 상사들에게 총애를 받고, 동료와 후배들에게 존경 받는 매력적인 주인공 볼코노고프 대위가 ‘재평가’ 대상에 오르고, 개심하고 참회하는 이유와 과정에 대한 설명 부족과 피해자 가족들에게 강압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내용 등 시나리오에 만만치 않은 헛점들이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부조리로 가득찬 세계’를 감안한다면 넘어갈 만하다.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선 위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가해자가 갑자기 나타나 사실을 다 털어놓고 용서를 구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영화 예고편에도 나오는 다음 장면은 음미할 만하다. 엔카베데에 끌려가 처형 당한 아버지를 둔 한 어린 아이가 볼코노고프에게 충고하듯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용서 안 해줄 거예요.”
송태형 문화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