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경제가 더 효율적?…시장경제 깎아내리는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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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경제교육 (3·끝)“계획경제가 국가정책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명령경제가 불평등을 완화한다.”
계획경제는 긍정적 평가하면서
시장경제 부작용 위주로 묘사
韓·美·中 같은 경제체제라 쓰기도
'한강의 기적' 기업 노력 안 다뤄
美는 MS·애플 창업자 상세 기술
고등학생이 배우는 경제 교과서에 이처럼 ‘계획경제와 명령경제의 장점’이 다수 기술돼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한국의 경제체제인 시장경제에 대해선 한계점이 집중 지적되고 있었다. 경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시장경제를 제대로 배우기 어려운 것은 물론, 오히려 부정적 인식만 각인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미, 중국이 모두 같은 체제?
15일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가 분석한 ‘고등학교 경제교과서 내용 및 집필 기준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 교과서에서 시장경제와 계획경제가 혼합된 경제체제가 일반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한 교과서는 한국과 미국, 중국이 모두 혼합경제 체제를 따르고 있다고 썼다.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정부 개입을 인정하는 한국·미국과 정부의 명령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되 특수한 경우에만 시장 기능을 받아들인 중국을 같은 체제처럼 보이게 기술한 것이다.
계획경제를 긍정하는 내용도 많았다. 한 교과서에는 “계획경제가 평등한 분배를 달성할 수 있다”는 표현이 담겼다. 다른 교과서는 “계획경제가 위기 상황에서 효과적”이라고 썼다.가격 통제가 암시장을 만드는 부작용이나 계획경제에서 극심한 기근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점을 쓴 곳은 없었다.
반면 시장경제에 대해선 “상호 갈등을 일으키는 체제” 등 비판이 많았다. 개인의 선호와 경제활동, 분업의 의미와 시장의 필요성, 창의와 경제 발전의 의미 등은 모든 교과서에서 설명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소연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연구위원이 지난해 한국교육경제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한국 통합사회 과목에서의 경제교육’에 따르면 통합사회 과목에서는 경제 주체의 역할을 ‘시장의 한계’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었다.양 교수는 시장경제 체제에서의 정부 개입과 계획경제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교과서들이 이를 같은 것으로 보이도록 오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정부가 주택공급 대책을 세워 주택을 공급하는 걸 계획경제라고 서술한 교과서도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양 교수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임금으로 근로자를 고용해 시장가격으로 건축자재를 구매하기 때문에 시장경제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이라며 “가격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경제는 시장경제”라고 강조했다.
○기업인 안 다루는 경제교과서
대부분 교과서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 과정을 설명하는 데도 소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이 과정을 주도한 경제 주체 중 하나인 기업과 기업인을 다룬 곳은 거의 없었다.한 교과서는 경제 성장이 정부 정책과 외부요인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설명했다. 경공업에서 반도체까지 이어지는 민간 기업의 노력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없었다.오히려 빈부격차와 환경오염 문제를 집중 부각하며 성장 과정의 부작용으로 국민 삶의 질이 악화했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내용도 있었다. 기업의 책임으로는 경제적·법적·윤리적 책임과 함께 ‘자선적 책임’이 제시됐다. 한국의 경제 발전 주역 중 하나인 주요 기업인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는 경제 교과서에서 기업과 기업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주요 선진국과 큰 차이가 있다. 미국은 교과서에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석유왕 존 록펠러, JP모간 창업자 존 피어폰트 모건 등을 다룬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 등도 등장한다.
일본도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치 오사카방직 창업자를 비롯해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 등 현지 대표 기업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회장,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 등을 역사 교과서에 싣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문재인 정부에서 무산됐다.양 교수는 “경제 발전은 근로자와 기업인, 정부, 가계가 혼연일치해 이룬 성과”라며 “현행 교과서는 기업가정신을 다루지 않다 보니 경제가 저절로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진규/임도원 기자 jos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