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삼성, ASML 주식 팔아 3조 확보…"반도체 투자 올인"

평택·美테일러 첨단공장에 투입
사진=뉴스1
삼성전자가 보유 중인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 지분 일부를 7년 만에 전격 매각했다. 이를 통해 3조원을 현금화했다. 경기 평택,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등에 짓고 있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라인 투자 비용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가 이르면 올 연말께 본격화할 반도체 업황 반등기에 대비해 ‘초격차 베팅’에 시동을 걸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15일 삼성전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이 회사가 보유한 ASML 주식은 지난 3월 말 629만7787주(지분율 1.6%)에서 2분기 말 275만72주(0.7%)로 354만7715주 감소했다. 지분 가치는 같은 기간 5조5970억원에서 2조6010억원으로 줄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올 2분기 ASML 주식 일부를 팔았다”고 확인했다. 2분기 ASML의 주가 흐름을 감안할 때 삼성전자는 지분 매각으로 3조원 안팎의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지분 매각은 반도체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로 분석된다.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경기 둔화에도 미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올 상반기 반도체 사업에 역대 최대 규모인 23조2473억원을 쏟아부은 게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업계 관계자는 “불황일수록 돌아올 호황기에 대비해 선제적 투자에 나서는 게 삼성의 성공 방정식”이라며 “삼성전자가 투자 재원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해 보유 중인 다른 기업의 주식도 매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반도체 초격차에 명운"…삼성전자, 투자금 확보 총력전
中 전기차 BYD 주식도 판 듯…다른 기업 보유지분 추가 매각 관측

삼성전자가 ‘깐부’로 불렸던 ASML 지분까지 매각한 건 투자비 확보를 위한 조치다. 세계적인 경기 둔화, 소비 시장 위축으로 실적이 급감했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를 늦출 수 없다는 게 최고위 경영진의 판단이다. 지난 2월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을 빌려 올 상반기 반도체에 역대 최대 규모인 23조2473억원을 투자한 게 대표적 사례다. 올 하반기에도 돌아올 반도체 호황기를 대비해 D램·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패키징을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계획이다.

‘대박’ 안겨준 ASML 지분 투자

1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2012년 ASML 지분 3.0%(1259만5575주)를 3630억원에 매입했다. 당시 ASML은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초미세 회로를 효율적으로 새길 수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개발 중이었다. 연구개발(R&D) 자금이 급했던 ASML은 고객사들에 일부 지분 인수를 타진했다. 삼성전자는 지분 매입을 통해 ‘전략적 협업’ 관계를 강화했다.

11년 전 투자로 삼성전자는 대박을 터뜨렸다. 2016년 3분기 삼성전자는 보유한 ASML 주식의 절반 정도를 팔아 약 7500억원을 챙겼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지난 3월 말 기준 ASML 지분 1.6%의 가치는 5조5970억원으로 치솟았다. ASML이 반도체장비업체 중 유일하게 EUV 노광장비 양산에 성공하면서 기업 가치가 불어난 영향이다. ASML 주가는 최근 5년간 252.5% 올랐다.

공장 한 곳에 30조…“돈이 급하다”

삼성전자와 ASML은 EUV 노광장비를 매개로 끈끈한 협업 관계를 이어왔다. 그런데도 삼성전자가 보유한 ASML 주식 중 354만7715주(0.9%)를 매각한 건 투자재원 확보의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으로 꼽힌다. 최근 최첨단 반도체 공장 한 곳을 짓는 데 필요한 투자금액은 ‘30조원 이상’으로 불어났다. 공정이 3나노미터(㎚·1㎚=10억분의 1m) 단위까지 미세화하고 EUV 노광장비 같은 첨단 장비 가격이 대당 4000억원 수준까지 치솟은 영향이다. 한 해 50조원 가까운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산업 주도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D램·낸드플래시 가격 하락, 파운드리 수요 위축 영향으로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반도체사업에서 8조9400억원에 달하는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그간 영업이익을 활용해 대규모 투자에 나섰던 삼성전자에 발등의 불이 떨어졌다. 지난 6월말 기준 97조원이 넘는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만 당장 현금화하는 건 쉽지 않아서다. 삼성전자는 보유 지분 매각을 택했고 3조원 안팎의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추산된다.

보유 지분 추가 매각 전망

삼성전자는 이번에 확보한 자금 대부분을 반도체 시설투자에 활용할 계획이다. 올 하반기에도 경기 평택의 메모리반도체·파운드리와 충남 천안의 패키징 라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 파운드리 공장에 대한 투자가 예정돼 있다. 인공지능(AI) 투자 확대, 스마트폰 신제품 출시 등으로 반도체 업황이 올 하반기 반등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서병훈 삼성전자 IR담당 부사장은 지난달 말 실적설명회에서 “인프라와 R&D, 패키징 투자를 지속해 중장기 경쟁력을 강화하고 성장 기반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투자금 확보를 위해 현재 보유 중인 기업 지분 중 일부를 추가로 매각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삼성전자는 2분기에 ASML뿐만 아니라 보유 중이던 중국 전기차업체 BYD의 주식 238만 주(0.1%·1000억원 규모)도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지분 투자에 따른 시너지 효과가 크지 않은 기업 지분을 굳이 보유할 이유가 없다”며 “삼성의 미래 사업인 로봇 등을 제외한 다른 기업 주식은 순차적으로 매각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