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고 사라진 바렌보임·이쑤시개 든 게르기예프…지휘란 무엇인가

[arte] 아무튼 바이올린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80명 내외의 프로 연주자들이 위대한 교향곡을 연주한다. 연주를 훌륭하게 마치고 관객들이 환호한다. 그런데 무대 맨 앞에서 박수를 받고 거듭 인사하는 사람은 정작 단 한 음도 연주하지 않았다. 그는 지휘자다. 청중은 그의 이름만을 기억하고 그날의 연주는 그와 어느 오케스트라의 것으로 남는다. 지휘대에 올라 손을 휘저었을 뿐인데, 대체 지휘가 뭐길래.

지휘자는 독재한다. 적어도 그럴 권리가 주어진다. 그는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지며 끌고 간다. 그래서 지휘자에 따라 완성된 음악이 확연히 달라진다. 음악을 만드는 과정 역시 큰 차이가 있다. 레퍼토리 선정부터 곡 전반의 해석, 미묘하며 세부적인 지시와 판단, 모두 지휘자의 몫이다. 단원들의 의견 수렴은 흔치 않은 일이다. 민주적인 방식을 선호하는 지휘자들이 없지 않지만, 도리어 지루하며 선명하지 못한 리허설 과정에서 단원들이 비효율을 느끼고 집중력을 잃을 수 있다. 이처럼 카리스마를 전제하는 자리이니만큼 필연적으로 스타 지휘자들이 등장한다. 독특한 스타일과 개성은 다양한 해프닝을 낳고,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불세출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연주 내내 눈을 감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죽하면 “카라얀 선생이 퇴장하실 때 누군가 부축해야 하지 않나요? 그분은 무대에서 눈을 안 뜨잖아요”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어떤 사람들은 교향곡의 모든 파트를 암보했다는 자신감의 과시가 낳은 버릇이 아닌가, 단원들과의 상호작용보다는 자아도취가 중요한 지휘가 아닌가 하며 수군거리기도 하지만 간단히 폄하하기엔 그의 결과물들은 너무나 굉장하다. 그래서 '눈 감고 지휘하기'는 카라얀의 독특한 스타일로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다.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명성이 높은 다니엘 바렌보임과 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는 2011년 8월 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베토벤 2번 교향곡 중 1악장을 연주한 후 돌연 전원 퇴장했다. 2000명 이상의 관객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1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는 중동 출신의 연주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특별히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전하며 5일에 걸쳐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무대에 올렸다. 이와 같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기념비적인 공연에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무대가 더워서’였다. 당시 대부분의 관객과 평단은 바렌보임이 무례했고 심술 궂었다고 야유를 보냈다. 이 해프닝이 보여주는 것은 그의 지나친 예민함과 오만일까, 완벽한 컨디션을 갖추고자 했던 철저함일까. 다양한 상황들을 고려하여 판단해야겠지만 지휘자들을 포함한 스타 연주자들이 상식을 뛰어넘도록 깐깐하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은 허다하다.
발레리 게르기예프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아주 작은 지휘봉을 사용하곤 한다. 지휘봉은 멀리 있는 연주자들도 잘 볼 수 있도록 정확한 사인을 주는 도구인 동시에 과거 교사를 칭할 때 사용했던 단어 ‘교편’을 떠올리게 하는 권위의 표상이다. 그러나 게르기예프의 이쑤시개만 한 지휘봉은 기술적 도구의 측면, 상징과 의미의 측면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국내의 한 매체와 인터뷰 중 게르기예프는 “눈빛, 표정, 그리고 열 손가락으로 지휘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큰 지휘봉은 그가 추구하는 섬세함과 정확한 소통을 저해한다는 뜻일까. 게르기예프와 연주한 경험이 없는 나는 작은 지휘봉이 테크닉 측면에서 효율적일지, 함께 연주하는 단원들은 어떻게 느낄지 의문을 갖는다. 어쨌든 이쑤시개 지휘봉을 드는 것은 아예 지휘봉 없이 손가락만으로 지휘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흥미롭다.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에게 의지하지만 불신하며 갈등하기도 한다. 연주를 하는 입장에서 좋은 지휘자와 힘든 지휘자가 구별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캐릭터,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과정과 결과의 질적 차이를 가져온다. 그가 독재적인지 민주적인지, 노장인지 신인인지 여부는 의외로 중요한 요인이 아니다. 좋은 지휘자는 등장부터 공기를 다르게 만든다. 집중하게 하며 서로의 연주를 듣게 한다. 리허설은 세세하고 일관성 있게 진행되고 그의 해석과 지적은 무리 없이 납득된다. 그 과정에서 오케스트라는 확신을 갖는다.

힘든 지휘자는 좋은 지휘자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지휘자다. 오케스트라의 단원 중에는 지휘자보다 연주 경험이 많은 분들이 허다하며 대부분 각자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연주자이자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들을 아우르고 만족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지휘자에게 절대 권력이 허락되어 온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함께하기 힘든 지휘자를 만나면 연습 도중에 투덜거리곤 한다.“제일 좋은 지휘자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는' 지휘자인 것 같아.”
다니엘 바렌보임
프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기회가 적은 지휘 전공 학생들을 위해 기획된 ’지휘 캠프‘에 우리 오케스트라가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아무래도 미숙하고 서툴렀다. 무대에서 연습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지휘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긴장하며 때로는 기분에 취해 즉흥적이었다. 어느 학생은 리허설 도중 여러 번 멈추고 '계속 느려집니다. 무거워지지 않게!' 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연주하는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동작이 무거워지고 따라서 템포도 계속 느려지고 있다는 것을. 악기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무리한 요구는 각 파트에 불만을 갖게 하고, 잇따른 엉뚱한 지적에 오케스트라는 지휘자에 대한 불신의 모드로 돌아선다. 결국 단원들은 ‘공부가 덜 된’ 지휘자와는 기계적으로 연주할 뿐 음악에 진심을 다하지 못한다. 좋은 음악이 나올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지휘자가 무대의 최전방에서 대표로 인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걸 수 있는 이유다. 권력이 막강하며 자신감과 고집이 필요하지만 그만큼의 책임을 지고 모두를 납득시켜야 한다. 만만치 않은 일이다. 내가 경험한 어떤 지휘자는 도무지 잘 풀리지 않던 연습 중에 한숨과 함께 호소했다.“내가 할 수 있는 건 손을 움직이는 것뿐이라고요!”

단 한 음도 연주할 수 없는 권력자, 지휘자는 이처럼 한없이 무력하기도 하다.


카라얀을 이어 베를린 필을 이끌었던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생의 마지막까지 주옥같은 연주들을 선보였다. 그는 2014년 1월 타계했고 같은 해 4월 그를 기리는 추모 공연이 열렸다. 아바도가 베를린 필에서 퇴임한 후 결성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이 공연에서 생전의 아바도가 유난히 애정을 가졌던 곡들을 연주하며 그의 열정과 빛나는 업적을 돌이켜 보고 애도했다.

그중 슈베르트의 교향곡 ‘미완성’이 지휘자 없이 시작되었고, 청중은 모두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날의 포디엄은 세상을 떠난 아바도의 것으로 비워두었다고. 미완성 교향곡의 표제는 영어로 ‘unfinished’ 라고 표기한다. 이 무대에서만은 불충분, 불완전을 의미하는 ‘incomplete’ 로 써도 무방할 것이다. 당신이 남긴 유산은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며, 당신의 부재로 인해 오케스트라와 무대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아바도에게 전하는 그리움과 존경의 표현이었을 테니.
클라우디오 아바도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의 애증과 갈등은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만 역시 지휘자는 중심에 있다. 물론 오케스트라는 그의 사병들이 아니고 단순한 조력자들도 아니다.

그러나 함께 같은 배에 올라있는 것은 확실하다. 선장이 없다 해서 배가 침몰하지는 않지만 좋은 선장을 만나면 모두 자기 자리에서 전력을 다할 것이고, 선장을 포함해 누구도 무기력하지 않을 것이다. 참 멋지고 즐거운 항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