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상자로 구찌·삼성·맥도날드 ‘러브콜’ 받은 이규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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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박스 의자, 종이봉투 조명“굳이?”라는 생각을 넘어서야 해요. “굳이?”라는 생각에 시도하지 않으면 남들과 똑같은 작품을 만들겠죠.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창작이니까요.
일상적 소재 재해석하는 이규한 가구 디자이너
"이걸 굳이?"라는 질문 받는 게 창작자의 본질
영화에서 큰 영감 받아… 반복과 변형이 큰 주제
이규한 작가(28)는 익숙한 소재로 낯선 가구를 만든다. 그는 나이키 신발 상자를 이어 붙여 벤치를, 맥도날드 종이봉투를 전구와 합쳐 조명을 만든다. 매일 수백명이 짓밟고 담배꽁초를 버리는 하수구 덮개까지도 이 작가에게는 작품에 쓰일 수 있는 소재다.언뜻 보면 불편해 보이고,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그의 가구는 밀라노의 갤러리 ‘스파지오 마이오치’의 큐레이터인 알레시오 아스카리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 작가는 지난 6월 동양인 예술가로는 유일하게 구찌의 ‘홀스빗 로퍼’의 출시 70주년을 기념하는 ‘구찌 홀스비트 소사이어티(Gucci Horsebeat Society) 전시회에 초청됐다. 그는 구찌 로고를 전통 한지에 입힌 조명을 만들어 구찌 역사의 한 면을 장식했다.이 작가는 구찌 외에도 여러 브랜드와의 협업을 활발한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난 6월 삼성전자 비스포크 냉장고 광고 업사이클링 프로젝트에 참여해 냉장고 패널과 촬영 세트장 가벽을 결합해 만든 의자를 선보였다. 맥도날드 홍콩은 ‘맥너겟‘ 출시 40주년을 맞아 연 전시회에 맥도날드의 갈색 종이봉투에 한지를 덧대어 만든 이 작가의 맥도날드 조명 작품을 전시했다.
일상 속 소재로 만든 가구로 전 세계의 브랜드들의 ‘러브콜’을 받고 있는 이규한 작가를 만났다.◆반복과 변형
이규한 작가의 작업실은 신발 상자, 맥도날드 종이봉투, 자전거 부품 등으로 가득했다. 그는 ‘반복’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한다. 일상 속 매일 마주하는 익숙한 물건들이 이 작가의 재료다. 그가 작품에 사용하는 자전거, 테니스공, 신발 상자, 하수구 덮개 모두 흔히 보이는 물건들이다.흔히 볼 수 있지만 무작위로 선택된 소재는 아니다. 이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그의 이야기가 녹아들어 있는 사물들이다. 그는 학창 시절 취미로 타던 픽시 자전거를 떠올리며 자전거 손잡이로 옷걸이를 만들고, 평생 도시에 살며 밟고 지나간 하수구 뚜껑으로 의자를 만든다. 이 작가의 대표작인 나이키 신발 상자 벤치도 패션에 관심이 많은 그의 방에 쌓여있던 나이키 상자를 보고 자연스레 시작한 프로젝트였다.그의 이야기가 담긴 소재들은 다른 재료와 합쳐지면서 변형을 거친다. 그는 하나의 작품에 최대한 많은 요소를 겹겹이 쌓으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종이, 한지, 철과 목재 등 여러 소재들이 겹치며 그의 작품은 단단해지고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이 뒤섞인다.그의 맥도날드 조명은 이 작가의 철학이 잘 드러낸다. 그는 맥도날드 포장지에 내구성을 더하고 동양적인 질감을 추가하기 위해 한지를 덧붙였다. 형태는 일본의 조명 디자이너 이사무 노구치의 ‘아카리 조명’을 오마주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맥도날드와 동양의 유산을 의도적으로 대치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많은 재료와 요소들이 섞여야 재밌는 작품이 나와요. 작품에 활용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 평소에도 관찰하는 시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고 말했다.그러면서도 그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 이 작가의 원칙이다. 그는 “저는 패션과 스트릿 문화를 좋아하지만, 작품이 그쪽으로만 치우치지 않도록 신경 써요. 전통 작가들을 오마주하는 것도 제 작품에 다양한 문화가 녹아들어 있으면 하기 때문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작품들이 직선적인 형태를 띠는 이유도 나이키와 맥도날드의 화려한 로고와의 균형을 고려한 선택이었다.◆영화로 시작된 예술관
문화와 재료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이 작가의 예술관은 영화에서 시작됐다. 방을 수백장의 DVD로 꽉 채울 만큼 영화광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는 어릴 적부터 전 세계의 영화를 보며 자랐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만난 이 작가는 일찍이 힙합 음악, 패션 등 다양한 문화에 눈뜰 수 있었다. 나이키 신발 상자 역시 영화로 접한 스트릿 패션에 빠져든 그의 삶의 일부였다.
그는 가장 닮고 싶은 예술가로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를 꼽았다. 스파이크 존즈는 영화, 뮤직비디오, 광고 등 다양한 매체에서 뛰어난 영상미와 연출로 인정받은 감독이다. 이 작가는 스파이크 존즈를 “아름답고 섬세한 미장센이 가득한 영화부터 어둡고 기괴한 힙합 뮤직비디오까지 만드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존즈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창작가가 되고 것이 꿈이라고. 그가 작품 속 다양한 소재와 문화 요소들을 압축해 넣는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이 작가의 앞으로의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영화를 사랑하는 그는 가구를 넘어서 영화나 무대를 디자인하는 미술감독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 작가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영화 ‘인터스텔라’ 속 5차원 공간을 컴퓨터그래픽(CG)이 아닌 실제 세트장으로 구현한 모습이 경이로웠습니다”며 “‘굳이’라는 생각을 넘어서는 자세가 남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요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많은 예술이 디지털화되고 있는 시대지만 무대나 세트장을 손수 만들어 선보이는 것이 제 꿈이죠”라며 ‘굳이’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