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R&D 예산 삭감이 카르텔 타파 해법인가

김진원 IT과학부 기자
“올해 기초연구를 시작해야 10년 뒤를 대비할 수 있다. 그런데 기획재정부 공무원이 줄자 놓고 빨간펜 쫙 그어 연구개발(R&D) 예산을 뚝 잘랐다.”

정부출연연구기관 고위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의 내년도 R&D 예산을 약 25% 삭감한 것에 대해 과학계를 대변해야 할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존재감이 없다며 이같이 말했다. 일부 과학기술 협·단체 예산은 70% 깎였다.▶본지 11일자 A5면 참조

한국은 과학기술로 먹고사는 나라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 평가에서 한국 정부 효율은 38위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39위다.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법규는 53위다. 평가 대상국 중 사실상 꼴찌 수준이다.

그러나 과학 인프라 항목만 떼어 보면 다르다. 한국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다. 세부적으로 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총 R&D 투자비(2위) △인구 1000명당 R&D 연구자 수(1위) 등 대부분 지표가 최상위권이다. 꾸준한 과학기술 R&D 투자가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물론 예산 배분 과정에서 비효율을 걷어내는 것은 필요하다. 보조금 성격의 사업, 뿌려주기식 사업도 구조조정해야 옳다. 정부 과제로만 연명하는 기업의 수명은 다해야 한다. 정부 예산을 눈먼 돈으로 여겼던 과학계도 반성할 지점이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주무부처인 과기정통부가 현재처럼 R&D 예산 일률 삭감으로 정책 방향을 잡는 것은 우려스럽다. 문제가 되는 사례를 정확하게 도려내고 해당 예산을 다른 R&D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예산을 일률적으로 삭감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종호 과기정통부 장관은 예산 배분·조정안 재검토에 대해 “R&D다운 R&D를 하는 쪽에는 예산도 더 많이 주라는 취지”라고 밝힌 바 있다. 대통령실 과학기술비서관 출신인 조성경 1차관은 “윤석열 대통령으로부터 과학기술 예산을 깎으라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예산을 제대로 배분하라는 의미지 삭감 내용은 전혀 없다”고 했다. 주영창 과학기술혁신본부장도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

과기정통부 장·차관의 발언이 식언(食言)이 될까 우려스럽다. 곧 발표될 R&D 예산 배분·조정안을 과학계가 엄중히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