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다람쥐, 춤추는 여인을 볼 틈도 없다면 [고두현의 아침 시편]

가던 길 멈춰 서서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방랑 생활을 오래 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1871~1940)의 작품입니다. 그는 일에 쫓겨 허덕거릴 때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자고 말합니다.

근심에 잠긴 사람에게는 눈앞의 아름다움도 보이지 않지요. 희망의 눈이 감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만 있어도 충분하지요.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이나 ‘별들 반짝이는 강물’까지라면 더욱 좋습니다. 그 여유가 아름다운 여인의 눈과 발, 춤추는 맵시, 입술에 번지는 미소를 발견하게 해주고 진정한 인생의 의미도 깨닫게 해주니까요.

뾰족한 직선의 세상을 둥글게 보듬어 안는 곡선의 미학! 그 오묘한 힘도 잠시 길을 멈추고 우리 주위를 둘러보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런 만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력 질주가 아니라 자기만의 속도를 조절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성장을 잠시 멈춰서라도 내실을 다지는 소나무처럼 말이죠.

소나무의 생장 방식은 특이합니다. 다른 나무들이 봄에 새싹을 틔우고 초가을까지 자라는 데 반해 소나무는 이른 봄에서 여름 직전까지 딱 한 마디만 자란 뒤 생장을 멈추지요. 대부분이 ‘자유생장’으로 키를 쑥쑥 키우는 대신 ‘고정생장’으로 내실을 다지며 천천히 자랍니다.
경쟁하듯 몸집을 불리지 않고 멈춤과 성장을 반복하며 제 속도로 뿌리를 뻗어가지요. 생장을 멈춰서라도 체질을 강화하고,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혜를 온몸으로 체득한 덕분입니다.

소나무는 춥고 척박한 땅에서 자랄수록 내구성이 뛰어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재목이 더욱 단단해지고 멋스러워지지요. 우리나라 소나무는 연교차가 30도에 이르기 때문에 목질이 아주 튼튼합니다. 그래서 귀한 건물의 대들보로 쓰이죠.

좋은 소나무처럼 큰 재목이 될 만한 인물을 동량지재(棟梁之材)라고 부르는데, 한자로 ‘마룻대(용마루) 동(棟)’에 ‘들보 량(梁)’이니 건물의 힘을 가장 크게 지탱하는 뼈대와 같다는 것이다. 거북선도 질 좋은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하죠?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자세히 보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천천히 걷는 동안 오래 가는 인생길도 발견하게 되지요.

옛말에 ‘큰 열매를 맺는 꽃은 천천히 늦게 핀다’고 했습니다. 유명 소설가인 이순원 씨도 초등학교 5학년 때 군 백일장에 나갔다가 아무 상도 못 받고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해요. 크게 낙담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운동장 가에 있는 나무 아래로 그를 불러서는 “너희 집에도 꽃나무가 많지?” 하고 묻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들려준 말을 그는 여태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같은 꽃 중에서도 일찍 꽃을 피우는 나무가 눈길을 끌지만 너무 일찍 피는 꽃은 나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나는 네가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다음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조금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클수록 단단해지는 사람 말이야.” 자, 그러니 한 번쯤 고요하게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볼 일입니다. 저도 급한 일이 있을 때 윌리엄 헨리 데이비스의 이 시를 펼쳐 읽도록 하겠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