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개혁안 '백화점식' 그칠 듯…연금개혁 시작부터 맹탕?
입력
수정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8월말 공청회서 최종 보고서 발표국민연금 개혁을 논의 중인 보건복지부 산하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가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지 않기로 했다. 국민연금의 고갈을 막기 위해 보험료율을 올려야(더 내야)한다는 덴 합의를 이뤘지만 소득대체율 인상(더 받는) 여부를 두고 전문가 위원 간 극한 대립이 이어지면서다. 당초 이달말 발표 예정이던 보고서엔 복수의 시나리오가 ‘무색무취’하게 제시될 전망이다. 9개월 간 15명의 위원이 사실상 여야 대리전을 벌이다 맹탕 보고서만 남긴 채 공을 정부에 떠넘기는 모양새다.
9개월 갑론을박 끝에 구체적 개혁안 제시 없이 시나리오만 제시하기로
보험료율 인상엔 일단 합의했지만...소득대체율 두고 '극한' 이견
개혁 공 떠넘긴 국회 연금특위이어 재정계산위도 정부에 책임 전가
총선 앞둔 정부도 총대 매기 부담...'맹탕' 개혁 반복 우려
17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재정계산위가 오는 8월말 발표 예정인 ‘국민연금 제도 개선방향’ 보고서는 특정안을 제시하지 않고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식에 그칠 전망이다. 재정계산위원회는 국민연금법에 따라 5년마다 설치돼 연금의 고갈 시점 등 재정수지를 계산하고 개혁안을 제안하는 역할을 한다. 2003년부터 시작돼 올해로 5번째 재정계산이다.재정계산위는 경영계, 노동계 등 가입자 단체와 학계 등에서 추천 받은 민간 전문가와 복지부, 기획재정부 담당 국장 등 총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작년 11월 첫 회의를 열고 현재까지 총 20번의 회의를 열어 국민연금 개혁안을 논의했다. 재정계산위가 8월말 공청회를 열어 연금개혁안의 윤곽을 제시하면, 정부는 가입자 단체들과 논의를 거쳐 10월말 윤석열 정부의 연금개혁 방향을 담은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을 내놓는다는 것이 당초 정부가 밝힌 계획이다.
재정계산위 위원들은 작년부터 재정계산위가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할지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여왔지만 지난 11일 열린 20차 회의에서 구체적인 개혁안을 내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간 위원회 내에선 “위원회 내에서 최대한 합의를 도출해 합리적인 안을 국민에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과 “전문가의 역할은 ‘분석’이지 의사결정이 아니다”는 입장이 대립해왔다. 재정계산위는 보고서에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연금수급개시연령, 기금운용수익률 등 다양한 제도 변수 변호에 따른 시나리오를 우선순위 없이 복수로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 9%인 보험료율을 12%, 15%, 18%로 올리는 것을 가정한 뒤, 여기에 다른 변수가 변화할 때마다 국민연금 재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제시하는 식이다. 지난 3월 발표한 5차 재정추계에 따르면 국민연금 적립금은 2040년 1755조원까지 불어난 뒤, 이듬해인 2041년엔 적자로 돌아서 2055년 완전 고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최대 관건은 소득대체율이다. 국민연금의 재정 안정을 주장하는 측은 보험료율은 최소 15% 이상으로 높이되 소득대체율은 현재 수준(40%)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국민연금의 노후 보장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측은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는덴 동의하면서도 소득대체율을 45% 또는 50%까지 높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더 내고 그대로 받는 개혁’(재정안정파)와 ‘더 내고 더 받는 개혁’(소득보장파)간의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결국 두 가지 선택지 모두 보고서에 담기게 되는 셈이다.
5년 전인 2018년 진행된 4차 재정계산 당시 국민연금 제도발전위원회(현 재정계산위 격)는 치열한 논의 끝에 안을 두개로 압축해 정부에 제시한 바 있다. 1안은 40%로 낮아지고 있던 소득대체율을 45%로 올리되, 보험료율도 2%포인트를 즉각 인상하는 ‘더 내고 더 받는’안, 2안은 소득대체율을 40%로 유지하되 2019년부터 10년 간 보험료율을 13.5%까지 단계적으로 인상하는 ‘더 내고 그대로 받는’안이었다. 이어 2단계로 수급개시연령을 높이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면 연금 지급액을 깎는 기대여명 계수 등을 도입해 약 4%의 보험료율 인상 효과를 내는 안을 제시했다.
5년 전 제도발전위 또한 재정안정파와 소득보장파 양측의 의견을 모두 담아 복수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구체적으로 특정해 정부에 제안했다. 당시 문재인 정부는 제도발전위가 제안안 2가지 안 가운데 선택하지 않고 되려 소위 ‘사지선다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고, 이후 정부와 국회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면서 연금개혁이 흐지부지 끝났다. 이번 5차 재정계산에선 전문가 제시안부터 ‘나열식’에 그치면서 연금개혁이 5년 전보다 더 ‘맹탕’에서 시작되는 셈이 됐다.맹탕 보고서는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부와 국회의 연쇄적인 책임 회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보험료율 인상 등 거대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 특정한 방향성을 밝히는 것이 정부로선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10월말 정부안이 제시되면 야당은 정부안에 각을 세우는 대안을 제시해 ‘맞불’을 놓곤 했다. 한 전문가는 “큰 틀에서 재정안정에 무게를 두고 있는 윤석열 정부가 ‘더 내는’데 초점을 맞춘다면 민주당 등 야당은 ‘더 받는’안을 내놓을 것”이라며 “미래세대의 부담을 줄이는 차원에선 더 내는 쪽이 합리적인 방향이지만 선거엔 불리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미 국회는 연금개혁의 공을 정부에 떠넘긴 상태다. 여야는 지난해 연금개혁에 대한 정치적 합의를 이루겠다며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특위 산하에 정부 재정계산위원회와 유사한 전문가 자문기구인 민간자문위원회를 만들었다. 당초 연금특위는 여야 합의를 이룬 연금개혁안 초안을 제시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정작 보고서 발표 시점이 다가오자 민간자문위에 “보고서에 숫자는 최대한 빼달라”고 요청했다. 총선을 1년 여 앞둔 상황에서 인기가 없는 보험료율 인상 등 연금개혁의 ‘총대’를 매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정치권 내부의 목소리가 커지면서다.
이에 3월 발표된 민간자문위의 최종 보고서는 논의된 다수의 안을 소개하는데 그쳐 ‘맹탕’이란 비판을 받았다. 이때 공을 넘겨 받은 재정계산위 마저도 9개월이란 시간에도 제대로 된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고 책임을 정부에 넘기게 된 것이다.
황정환 기자 j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