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선희의 미래인재교육]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될 영유아 사교육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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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부모도 미리 사교육에 길들여져최근 대한민국에는 ‘초등 의대입시반’에 이어 ‘4세 고시’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4세 고시란 네 살짜리 아이가 유명 영어학원에 입학하기 위해 레벨테스트 준비학원에 다니며 재수까지 불사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국영수, 예체능은 기본이고 독서, 논술, 한자, 과학, 창의, 최근에는 코딩, 로봇, 인공지능(AI)까지 사교육 과목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시작 연령도 유아에서 3~4세 영아까지 점점 낮아지고 있다.
과도한 선행학습으로 '번아웃 키즈'까지
채선희 중앙대 교육학과 객원교수
교육부와 통계청이 공동 조사해 발표한 2022년 우리나라 사교육비는 약 26조원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초·중·고만을 대상으로 한 사교육비다. 그동안 영유아 사교육비는 육아정책연구소의 조사(2013~2017년)가 유일한 지표였는데 이마저도 2017년 종료됐다. 당시 영유아 사교육비는 3조7397억원으로 전년(1조3809억원)보다 세 배 가까이 폭증했으니 현재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으로 예상된다.과도한 영유아 사교육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공교육을 만나기도 전부터 아이와 부모 모두 사교육 시스템에 길들여지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더 좋은 학원을 찾아 이동하는 아이들은 취학 전부터 이미 ‘학원 중독’에 빠져 사교육 없이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또 영유아기는 신체, 정서, 사회성, 인지 등이 조화롭게 발달해야 하는데 과도한 사교육으로 이 균형이 깨지는 것도 문제다.
최근 지나친 스케줄로 아이다운 발랄함을 일찍 소진해버린 ‘번아웃 키즈’까지 생겼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만 18세 이하 아동·청소년의 우울증, 불안장애가 급증하고 소아청소년 정신과 병원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더군다나 영유아들은 취학 전이기 때문에 국가의 관리를 받지 못한다. 이들의 부모는 주로 학원이나 맘카페 등을 통해 과잉 교육 정보를 접한다. 여기에 ‘내 아이가 우선’이라는 경쟁 심리와 학원의 불안 마케팅이 결합하면서 사교육 열풍이 거세지는 것이다.
사교육의 주요 목표는 ‘선행학습’이다. 선행학습은 근본적으로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공부해야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경쟁의식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영유아는 취학 전 사교육을 통해 초등 저학년 과정을, 심한 경우 초등 고학년 과정을 마스터한다. 초등학생이 되면 중학교 과정을, 중학생이 되면 고등학교 과정을 선행학습하는, 장기간의 선행학습 체인이 돌아가는 것이다. 학원이 선행교육을, 학교가 후행교육을 하는 상황에서 학교는 단지 졸업장을 받거나 내신성적을 받기 위한 곳으로 전락하고 만다.
독일에서는 취학 전 선행학습을 금지하는 이유로 ‘교사의 수업권과 학생의 학습권’을 꼽는다. 선행학습을 한 학생이 있으면 교사가 준비한 수업을 정상적으로 진행하는 데 방해가 되고, 다른 학생들이 생각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2014년부터 선행학습금지법이 시행됐지만 유명무실하다. 선행학습금지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세부 규정이나 별도의 규제 조치 등을 보완해야 한다. 또 공교육이 부재한 영유아 시기부터 과도한 사교육이 시작되는 현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된다. 공교육 시스템을 통해 영유아 부모를 위한 예비 학부모 교육과 상담이 이뤄져야 한다. 영유아 교육 콘텐츠와 부모 교육 자료를 다양하게 개발·보급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영유아 교육을 관리하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