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아이콘' 점령한 女 아티스트들을 베를린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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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변현주의 Why Berlin국립 미술 도서관, 미술공예 박물관, 베를린 필하모니 등이 모인 베를린의 문화지구 쿨투르포럼(Kulturforum)에는 신국립 미술관(Neue Nationalgalerie)이 있다. 지난 세 번째 칼럼에서 소개했듯 신국립 미술관은 동시대성을 반영하는 전시를 선보이고, 격변의 20세기 역사적 현장이었던 베를린의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조명한 현대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모더니즘의 대표적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의 건축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유행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인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과도 밀접한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장이었던 미스는 ‘Less is More’라는 어록을 남겼듯이 단순함의 미학과 투명성, 개방성이 돋보이는 건축물을 철과 유리라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재료로 만들었다.
신국립 미술관 역시 이러한 미스의 스타일이 두드러지는 건축물로 1968년 개관한 이래 ‘빛과 유리의 전당'이라 불리며 베를린의 대표적 현대미술관으로 역할하고, 2016부터 시작된 6여 년간의 보수 작업 끝에 2021년 8월 재개관하였다. 덧붙이자면, 모더니즘 대가의 이 건축물은 서울의 아모레퍼시픽 본사 건축가로도 유명한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가 본래의 모든 디테일을 살려 6여 년에 걸쳐 보수하였다.
신국립 미술관의 전시 공간은 1층과 뒤편의 정원과 연결된 지하 1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의 거대한 글래스 홀은 건축물로서는 아름다워 보이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으로는 부적합해 보인다. 평면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벽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가벽을 설치해야 하고, 특정 작품에 조명 효과를 주는 것도 투명한 유리로 들어오는 자연광 때문에 부가적 장치를 필요로 한다. 또한 이 거대한 ‘유리 궁전'을 찾을 때면 공간과 소통하는 기분이 들기보다 건축의 외연 및 건축가의 자의식에 의해 압도되는 불편함을 종종 느끼곤 했다.하지만 최근 필자는 신국립 미술관의 1층 글래스 홀에서 열렸던, 그리고 열리고 있는 전시를 통해 모더니즘 건축의 아이콘이 여성 아티스트에 의해 재해석되며 전복되는 현장을 목격하는 유쾌한 경험을 하였다. 그 중 하나는 2022년 11월부터 지난 2023년 5월까지 열렸던 모니카 본비치니(Monica Bonvicini)의 개인전 《I do You》이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본비치니는 30여 년간 건축과 권력, 젠더의 관계에 대해 탐색하는 작업을 주로 해왔고, 이번 전시에서 미스의 건축물에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이 압도적인 공간에 도전하고 개입해 관객이 공간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게 탈바꿈시켰다.미술관 입구에는 15x15 미터 크기의 거울 위 ‘I do You’가 쓰인 작품이 설치되어 관객들은 미스의 유리 궁전을 들여다 보는 대신에 스스로를 직면하거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며 전시 공간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탁 트인 전시 공간의 중심에는 거울로 구성된 대형 설치물 <Upper Floor>(2022)가 보이며 미스의 건축물이 이제는 공간에 있는 이들을 비추고 반향하는 공간으로 변했음을 나타내고, 관객이 설치 작품의 2충으로 올라가 공간을 수평으로 다시 나눈 곳에서 미술관 전체를 바라보며 그곳에 설치된 또 다른 작품들을 경험하도록 이끈다.2층에는 아디다스 트레이닝 스웨트, 청바지, 흰색 또는 검은색 바지 등 작가의 바지를 찍은 수백 개의 사진을 프린트한 카펫 작업 <Breach of Decor>(2020-22)가 바닥에 설치되었고, 철제로 된 해먹 <Chainswing Belts>(2022) 등 가죽이나 철제로 만든 설치 작업이 이곳저곳에 놓여 관객이 작품 위에 앉거나 누워 공간을 점유할 수 있게 하였다. 더불어 여성 아티스트 역시 대담한 재료로 여겨지는 철제나 가죽, 거울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음을, 그러나 ‘남성적'으로 여겨지는 재료로 공간을 지배하기보다 관객 및 공간과 상호적 교류를 추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 다른 전시는 독일의 대표적 작가 이자 겐즈켄(Isa Genzken)의 《Isa Genzken. 75/75》으로 작가가 75세가 된 것을 기념해 75점의 작품을 작가의 생일인 11월 27일까지 전시한다. 겐즈켄의 작업은 그가 작가로 활동한 시간 만큼 폭넓고 다채로우나 그 어떤 것으로도 정형화되지 않으려는 끊임 없는 시도가 바로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겐즈켄의 미니멀한 초기 작품 <Rotes Ellpsoid>(1977)부터 안테나를 붙인 <World Receiver>(1988-89), 다양한 소품을 한데 모아 만든 아상블라주(assemblage)인 <Empire/Vampire>(2003), 그리고 작가의 옷을 입힌 마네킨 같은 최근 작업까지, 세심하게 선택된 75점의 작품은 시간에 따라 공간을 구획하거나 주제에 따라 작품을 설치하는 익숙한 전시 방식이 아니라 개방적 전시 공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개시킨 방식으로 설치되어 일종의 미로를 만들었다. 관객은 좌대 위에 설치되거나 독립된 개체로 세워진 작품들 사이를 걸으며 마치 50여 년 활동한 대표적 여성 아티스트를 위한 제단 사이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전략적으로 계획된 모더니즘의 유리 공간과 대조되게 정형성을 거부하는 예술이 주는 에너지를 경험하게 된다.특히 [Fuck the Bauhaus] 연작은 일상성을 강조하며 삶과 분리되지 않은 예술을 추구한 바우하우스와 일상적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 외에 유사성이 거의 없는 겐즈켄의 작업의 차이를 두드러지게 나타내며 작품 자체로 마치 미스의 유리 미술관에 날카로운 비평을 던지는듯 보이기도 한다.
절제의 미학과 정형성을 통해 형이상학적 이상을 구현하려 했으나 어떤 측면에서는 공간을 경험하는 이들을 배제한 미스의 ‘유리 궁전'은 관객을 공간과 상호작용하게끔 초대한 모니카 본비치니와 비정형으로 특징지어지는 작업으로 공간을 흐트러뜨리듯 펼친 이자 겐즈켄의 전시로 재해석되고 점령당했다. 이처럼 역사의 연장선 상에서 예술은 다시 읽히고 서로 소통하며 새로 쓰인다.
전시 기간에 신국립 미술관을 찾는 이들에게 흥미로울 수 있는 사족을 첨언하자면, 지하 1층에서 개인전을 선보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는 겐즈켄의 전 남편으로 이 둘의 예술 세계가 어떻게 교차하고 차이를 보이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람의 포인트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