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판 나토'와 필리핀…되돌아본 '태평양동맹' 좌절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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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필리핀 키리노 대통령, 태평양동맹 결성 첫 제안
이승만 적극 동조…미국 반대로 끝내 무산
'패권도전국' 중국 압박 위해 美 새로운 집단안보체제 시도
"이제 중국은 (미국이) 필리핀 같은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이면서 동맹 관계를 확대할 조짐들을 주시할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19일(현지시간) 보도한 '중국의 적의(rancor)를 심화시킬듯한 방위 합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중국의 군사전문가 쑹중핑이 한 말이다.한미일 3국이 18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에서 기존과 확연하게 다른 수준의 3국 안보협력 합의를 도출하자 중국이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가운데 쑹중핑은 필리핀을 꼬집어 거론했다.
그는 3국에 더해 필리핀이 가세할 경우 이것은 '인도·태평양판 나토'가 될 것이기에 중국엔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라고 말했다.중국이 '필리핀 변수'를 언급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이 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서도 현재 유럽의 안보동맹체인 나토와 같은 '태평양동맹'(Pacific Pact) 결성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자본주의 체계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특히 소련과의 냉전 대결구조가 심화하자 소련 봉쇄를 위해 유럽에서는 나토 결성을 서둘렀다.
1949년 3월 18일 미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나토 결성을 일제히 발표했다.
나토는 가맹국 중 한 국가 또는 다수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당사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즉각적 군사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한 집단안보체제였다.이에 고무된 아시아 각국도 미국의 지지와 후원을 얻어 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49년 3월 20일 필리핀의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시아에서도 태평양동맹이 결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즉각 호응했다.
3월 23일 태평양동맹 결성에 적극 찬성하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아시아·태평양에서도 유럽의 나토와 같은 집단안보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오던 참이었다.
게다가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이 가시화하는 상황이었다.
필리핀과 한국에 이어 중화민국 정부가 적극적이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는 국공내전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런 장제스에게 태평양동맹의 결성은 미국의 힘을 활용할 돌파구로 여겨졌다.
장제스는 그해 7월 10일부터 이틀간 필리핀 바기오를 방문해 키리노와 회담을 가졌다.
키리노와 장제스는 아시아 각국에 태평양동맹 결성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이승만과 장제스는 그해 8월 6일부터 사흘간 한국의 진해 대통령 별장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고, 역시 공동성명을 통해 태평양동맹 결성을 재차 주창했다.
그러나 미국이 소극적이었다.
당시 아시아 각국은 유럽과 달리 반식민지 상태 또는 신생 독립국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각국의 '일본 배제'가 결정적인 장애로 등장했다.
'일본 배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앞장섰다.
여기에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도 태평양동맹 결성에 사실상 반대했다.
결국 냉전 시대 적국인 소련 대응에 집중해야 했던 미국의 외면 속에 아시아에서의 태평양동맹 창설은 무산됐다.
이 와중에 중국 대륙에서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그 다음해인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 전쟁 도중인 1951년 미국은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했다.
6·25 전쟁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반공 동맹 전선이 강화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집단안보체제 대신 아시아 각국과 양자동맹을 체결하는 쪽을 선택했다.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종전 이후에도 집단적 안보체제 결성을 모색했다.
1953년 11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장제스 총통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해 '반공 통일전선을 결성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은 1954년 6월 한국 진해에서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창설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미국의 참여가 없는 상태에서 '아시아판 나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고비로 미국은 중국을 세계 패권에 도전하는 최대 위협으로 설정, 중국을 압박하고 포위하는 '통합억제'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철저하게 동맹과 함께하고 있다.
미국은 인도와 일본, 호주를 묶어 쿼드(Quad) 안보협의체를 가동하고 있고, 이번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묶어 새로운 3국 안보협력체를 끌어냈다.잘 알려진 대로 필리핀은 중국과 남중국해 분쟁을 겪고 있다.
그런 필리핀에 대해 미국은 철통같은 방위 공약을 약속하고 있다.
중국이 필리핀 변수를 의식하는 이유이다.
한미일 3국 안보협력체의 성격이 '준 군사동맹' 수준이 될 것이냐는 논란과 함께 필리핀 변수가 부각되는 것은 미중 패권경쟁이 그만큼 가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 경쟁이 고조되면 될수록 더욱 많은 변수가 돌출할 것이고, 이는 한국 외교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연합뉴스
이승만 적극 동조…미국 반대로 끝내 무산
'패권도전국' 중국 압박 위해 美 새로운 집단안보체제 시도
"이제 중국은 (미국이) 필리핀 같은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이면서 동맹 관계를 확대할 조짐들을 주시할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가 19일(현지시간) 보도한 '중국의 적의(rancor)를 심화시킬듯한 방위 합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중국의 군사전문가 쑹중핑이 한 말이다.한미일 3국이 18일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의에서 기존과 확연하게 다른 수준의 3국 안보협력 합의를 도출하자 중국이 '아시아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는 가운데 쑹중핑은 필리핀을 꼬집어 거론했다.
그는 3국에 더해 필리핀이 가세할 경우 이것은 '인도·태평양판 나토'가 될 것이기에 중국엔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라고 말했다.중국이 '필리핀 변수'를 언급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이 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시아에서도 현재 유럽의 안보동맹체인 나토와 같은 '태평양동맹'(Pacific Pact) 결성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자본주의 체계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특히 소련과의 냉전 대결구조가 심화하자 소련 봉쇄를 위해 유럽에서는 나토 결성을 서둘렀다.
1949년 3월 18일 미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나토 결성을 일제히 발표했다.
나토는 가맹국 중 한 국가 또는 다수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당사국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즉각적 군사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한 집단안보체제였다.이에 고무된 아시아 각국도 미국의 지지와 후원을 얻어 집단안보체제를 결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었다.
1949년 3월 20일 필리핀의 엘피디오 키리노 대통령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아시아에서도 태평양동맹이 결성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즉각 호응했다.
3월 23일 태평양동맹 결성에 적극 찬성하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사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아시아·태평양에서도 유럽의 나토와 같은 집단안보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오던 참이었다.
게다가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이 가시화하는 상황이었다.
필리핀과 한국에 이어 중화민국 정부가 적극적이었다.
당시 장제스(蔣介石)는 국공내전에서 밀리고 있었다.
그런 장제스에게 태평양동맹의 결성은 미국의 힘을 활용할 돌파구로 여겨졌다.
장제스는 그해 7월 10일부터 이틀간 필리핀 바기오를 방문해 키리노와 회담을 가졌다.
키리노와 장제스는 아시아 각국에 태평양동맹 결성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이승만과 장제스는 그해 8월 6일부터 사흘간 한국의 진해 대통령 별장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고, 역시 공동성명을 통해 태평양동맹 결성을 재차 주창했다.
그러나 미국이 소극적이었다.
당시 아시아 각국은 유럽과 달리 반식민지 상태 또는 신생 독립국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 각국의 '일본 배제'가 결정적인 장애로 등장했다.
'일본 배제'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앞장섰다.
여기에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총리도 태평양동맹 결성에 사실상 반대했다.
결국 냉전 시대 적국인 소련 대응에 집중해야 했던 미국의 외면 속에 아시아에서의 태평양동맹 창설은 무산됐다.
이 와중에 중국 대륙에서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고, 그 다음해인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 전쟁 도중인 1951년 미국은 일본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체결했다.
6·25 전쟁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반공 동맹 전선이 강화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하지만 미국은 집단안보체제 대신 아시아 각국과 양자동맹을 체결하는 쪽을 선택했다.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종전 이후에도 집단적 안보체제 결성을 모색했다.
1953년 11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장제스 총통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해 '반공 통일전선을 결성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은 1954년 6월 한국 진해에서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창설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미국의 참여가 없는 상태에서 '아시아판 나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을 고비로 미국은 중국을 세계 패권에 도전하는 최대 위협으로 설정, 중국을 압박하고 포위하는 '통합억제'를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철저하게 동맹과 함께하고 있다.
미국은 인도와 일본, 호주를 묶어 쿼드(Quad) 안보협의체를 가동하고 있고, 이번 캠프 데이비드 3국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묶어 새로운 3국 안보협력체를 끌어냈다.잘 알려진 대로 필리핀은 중국과 남중국해 분쟁을 겪고 있다.
그런 필리핀에 대해 미국은 철통같은 방위 공약을 약속하고 있다.
중국이 필리핀 변수를 의식하는 이유이다.
한미일 3국 안보협력체의 성격이 '준 군사동맹' 수준이 될 것이냐는 논란과 함께 필리핀 변수가 부각되는 것은 미중 패권경쟁이 그만큼 가열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 경쟁이 고조되면 될수록 더욱 많은 변수가 돌출할 것이고, 이는 한국 외교의 새로운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게 외교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