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가 시끄럽게 운다고? 아름답게 노래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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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현호의 바벨의 도서관수종에 관계없이 굵기가 좀 되는 나무마다 허물이 하나둘 생기나 싶더니 여름의 한 가운데에 이르자 금세 온 동네를 뒤덮은 매미 소리에 문을 열어 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예르모 델토로가 정성 들여 디자인한 것처럼 보이는 매미의 생김새만큼이나 고유의 우렁찬 소리가 여름 하늘을 꽉 채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새 입추와 말복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도 불더니, 끝날 것 같지 않던 매미 소리도 잦아들고 있습니다. 확실히 개체 수가 줄어든 것 같습니다. 곤충 소리치고는 소음에 가깝다고 생각했던(실제로 자동차 소음에 비해서도 데시벨 수치가 높다고 합니다) 매미들의 짝짓기 노래도 아쉬워지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얼핏 봐도 몇 마리 남지 않은 매미 대신 귀뚜라미와 다양한 풀벌레가 새벽의 풍경을 차지한 것으로 미루어 가을이 시작되려나 봅니다.“매미 때문에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네”라는 초등학생 딸아이의 말에 여섯 살배기 동생이 대꾸합니다. “시끄러운 게 아니야, 노래하는 거야.”
찬 바람이 불자 한여름 아이들의 대화 중 이 대목이 자꾸만 떠오릅니다. ‘시끄러운 게 아니라 노래하는 매미’라니, 어린아이의 해석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는 수 만 년 동안 매미 소리를 그리워했을 텐데, 무르익어 한창일 때에는 제대로 감동하지 못했던 게 아닐까 반성하게 됩니다.한 번은 산책 중에 등나무가 휘감아 큰 가지 하나가 고사 위기에 처한 은행나무를 돕겠다며 원예용 가위로 이를 자른 적이 있습니다. 아들에게 자랑삼아 “아빠가 은행나무를 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이야기합니다. “아빠, 등나무도 자연인데 그걸 자르는 게 ‘자연’스러운 게 맞아? 그대로 놓아두는 게 자연에 가까운 게 아닌가? 아빠가 자연의 법칙을 어겼네.”제주 여행 시 곶자왈에 관한 설명을 들을 때 숲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꽃·열매를 맺는 나무와 덩굴 식물이 서로 어떻게 어울려 숲을 이루는지 저도 함께 배웠습니다만, 아이는 기억했고 저는 깨닫지 못한 것뿐입니다.
황금빛 단풍잎만큼 특유의 고약한 냄새로 유명한 은행나무에 대해서는 더욱 깊은 깨달음을 준 기억도 있습니다.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는 은행나무는 인류보다 지구에 먼저 살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은행나무의 발생 시기는 대략 2억 년 전입니다. 현생 인류의 직속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고작 20만 년 전에 나타났으니 은행나무는 대선배 격의 생명체입니다.
그러니까 은행나무 열매로부터 사람 똥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사람 똥이 은행나무 열매 향을 닮은 것이라고 해야 맞는 말인데, 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은행을 밟을 때마다 ‘냄새가 나서 어쩌나’하고 걱정하기보다는 ‘내가 이렇게 살아 수억 년을 관통하고 있구나’ 생각합니다.작은 일상에서조차 오래되어 딱딱해진 생각을 바꾸기란 참 쉽지 않은데 하물며 지동설과 진화론 이전, 지금까지의 사실을 진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해의 시간이 필요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개인적으로도 오래된 믿음을 깨는 사건이 많았던 올해에는 다른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일부러 관련 독서에 공을 들였습니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이 쓴 <동물의 감정에 관한 생각> <차이에 관한 생각>으로 시작해 바버라 J. 킹의 <동물은 어떻게 슬퍼하는가> 등을 읽었고, 여성학자 리베카 솔닛이 쓴 <오웰의 장미>도 읽었습니다.
‘위기의 시대에 기쁨으로 저항하는 법’이라는 부제가 이야기해주듯 스스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을 정도로 파시즘과 폭력, 야만성에 온몸으로 맞섰던 작가 조지 오웰은 정원 가꾸기에 정성을 들였습니다. 오웰에게 정원을 가꾸는 일은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것을 다시금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솔닛의 설명처럼 숭고한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아이들과 매미 소리를 들으며 나눴던 작은 이야기는 ‘꾸준히 굳어진 생각을 깨야겠다’는 반성으로, 일상성을 회복하고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온전하게 다듬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마치 오웰의 정원 가꾸기처럼, 비록 보잘것없더라도 책을 읽거나 오래된 음반을 턴테이블에 슬쩍 올려두는 일상을 지속하려고 합니다. 미약하지만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계절이 오고 있어 반가운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