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전관 카르텔 척결에 깨져버린 계약 원칙

LH 계약 해지에 줄소송 예고
공공주택 50만가구 공급 차질

서기열 건설부동산부 기자
“공공기관이 법적 절차를 다 거쳐 체결한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는 건 스스로 정한 원칙을 깨는 겁니다. 해지당한 업체에서는 당연히 민사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전관 업체와 설계·감리 용역 계약을 전격 해지하기로 발표한 뒤 만난 한 변호사는 이 같은 우려를 나타냈다. 단지 그 업체에 LH 퇴직자가 재직하고 있다는 이유로 공기업이 이미 체결한 계약을 일방적으로 깨는 것은 법적 분쟁의 후폭풍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서다.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 분명한 책임 사유가 용역업체에서 드러나지 않은 상황이어서 향후 해지의 정당성을 놓고 업체와 LH 사이에 줄소송이 예상된다.지난 20일 LH는 ‘LH 용역 전관 카르텔 관련 긴급회의’에서 지난달 31일 이후 LH 퇴직자가 근무하고 있는 업체와 체결한 11건, 총 648억원 규모의 계약을 전격 해지한다고 공개했다. LH도 법적 분쟁의 가능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이한준 LH 사장은 “(계약 취소에 따른) 법적인 문제가 분명히 있을 수 있지만, 전관의 고리를 이번 기회에 단절하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으로 여겨달라”고 말했다.

이번 계약 해지로 약 2800가구의 공공주택 공급 일정이 늦춰지게 됐다. 해지된 사업과 공고를 중지한 사업에서 공고를 재개하려면 수개월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하반기로 예정된 공공주택 공급 계획이 줄줄이 미뤄지면 피해를 보는 것은 공공주택을 기다려온 일반 국민이다. 이 정부에서 목표로 한 공공주택 50만 가구 공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물론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는 전관예우는 당연히 척결해야 할 악습이다. LH 퇴직자가 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해 입찰이 불공정하게 이뤄졌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직 전 직원이 부실 공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확신할 분명한 증거가 드러난 게 없는 상황에서 계약 해지는 너무 앞서가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기획재정부의 계약예규 용역계약일반조건에 따르면 계약을 해제 또는 해지하기 위해선 계약 상대자의 책임 있는 사유, 발주자의 사정 변경 등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LH 퇴직자가 재직하고 있다는 점이 계약을 해지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게 업계 전문가의 견해다. ‘이권 카르텔 혁파’라는 명제에 가려 계약의 원칙을 깨는 무리수를 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