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사심 없이 일한 금융공무원… 최용호 금융위 금융안정지원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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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호 금융위원회 금융안정지원단장이 지난 22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4세.
최 단장은 서울 휘문고(80회)와 서울대 경제학과(88학번)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 41회를 통과해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재경부를 거쳐 금융위에서 금융시장분석과장, 서민금융과장, 산업금융과장, 행정인사과장, 자본시장조사단장 등을 지냈다. 2021년 고위공무원단으로 승진해 금융그룹감독혁신단장을 맡았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은주씨와 딸 정윤양이 있다. 최 단장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판단력과 일처리가 발군이었다. 그가 '스타 사무관'이 된 것은 2002년 초 조흥은행 매각과정이었다. 정부는 조흥은행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투입된 공적자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워낙 강하던 시절이었다. 인수자(신한은행) 측에선 시장가격을 원하고, 정부는 장부가격을 원하는 간극이 컸다. 이때 잠재적으로 부실이 있는 조흥은행의 장부가를 현실적으로 계산하기 위해 인수가격 납입 시점을 조정하거나 매각대금을 상환전환우선주(RCPS)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낸 것이 당시 최 사무관이었다. 변양호 당시 금융정책국장, 추경호 은행과장의 큰 짐을 덜어준 아이디어였다.
2005년 무렵엔 삼성생명 관련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의 해석이 큰 이슈였다. 최 단장은 사무관으로서 당시 김광수 금융정책과장(현 은행연합회장), 권대영 총괄서기관(현 금융위 상임위원)과 함께 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이동걸 당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과 참여연대 등 외부에서는 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삼성그룹 계열사 주식취득을 금융감독 당국이 문제삼지 않은 것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김 회장은 "당시 정부가 삼성그룹을 위해서 문제를 처리한다는 세간의 인식이 워낙 강해서 애를 먹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최 사무관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없이' 일한다는 점만큼은 인정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금산법에 따라 초과지분 매각명령을 내리는 것의 위헌성을 조사해 보자는 최 사무관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법무법인들이 위헌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재경부와 금감위는 그해 말 금산법 초과지분을 매각하는 대신 의결권만 제한하는 내용의 금산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현재까지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하지 않고 있는 근거가 된 조항이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도 있는 사안이지만, 민감한 문제를 냉정하게 다루는 그의 태도와 합리적인 견해는 많은 이들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중소기업 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 전자금융법 초안 등의 기틀을 잡는 데도 많은 역할을 했다. 청와대 대통령실 파견을 거쳐 금융시장분석과장으로 일할 때는 은행들의 CD금리 담합 이슈 대응, 코픽스 도입 등을 주도하며 매끄러운 일 처리로 주목받았다. 산업금융과장 시절에는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등 당대의 굵직한 사안들을 도맡았다. 금융회사와 자본시장에서 예의 '칼 같은 스타일'을 두루 인정받았다.
그를 기억하는 선후배들과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최 단장의 '눈'이 높았다는 점이다.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나 기자들의 기사에 대해서도 방향이 잘못되거나 디테일이 틀린 부분을 명확하게 잡아내고 짚었다. 쓴 소리를 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디테일에 강한 만큼 윗사람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와 한번 합을 맞춘 윗사람은 꼭 그를 다시 찾는다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금융위 출신인 이한진 김앤장 변호사는 "화를 내는 듯이 보이다가도 한 시간 후에는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저렇게 고치면 된다고 알려주곤 했다"고 돌이켰다. 기자들에게도 잔소리를 자주 했으나 꼭 콜백을 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도록 일러주는 데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빠른 두뇌회전과 따뜻한 성정을 함께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행시 통과 후 새내기 공무원이던 28년 전 처음으로 암이 발병한 것을 알게 됐다. 철저한 관리와 노력으로 당시에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후 지병이 있었다는 것도 외부에서는 알기 어려울 만큼 업무에 몰두하며 지냈다. 수년 전 다시 암이 재발했고, 몸이 회복된 후 업무에 복귀했으나 지난달부터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는 22일부터 24일 오전 발인까지 금융계 전현직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최상목 경제수석, 김주현 금융위원장 등 기획재정부(재경부)와 김석동 임종룡 최종구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 정은보 전 금융감독원장 등 금융위 출신 관계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서 그를 애도했다. 이틀 연속, 사흘 연속으로 자리를 지킨 이들도 적잖았다. 24일 오전 발인 장소에서도 변양호 VIG파트너스(옛 보고펀드) 고문, 김광수 은행연합회장, 박정훈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등이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최 단장이 아까운 인물이었다며 침통해했다. 박민우 금융위 자본시장국장은 "행시는 내가 한 해 먼저 됐지만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언제나 최 단장이 '형'이었다"며 눈물을 비쳤다. 다른 이들의 마음도 모두 비슷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최 단장은 서울 휘문고(80회)와 서울대 경제학과(88학번)를 졸업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 41회를 통과해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재경부를 거쳐 금융위에서 금융시장분석과장, 서민금융과장, 산업금융과장, 행정인사과장, 자본시장조사단장 등을 지냈다. 2021년 고위공무원단으로 승진해 금융그룹감독혁신단장을 맡았다. 유족으로는 아내 이은주씨와 딸 정윤양이 있다. 최 단장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판단력과 일처리가 발군이었다. 그가 '스타 사무관'이 된 것은 2002년 초 조흥은행 매각과정이었다. 정부는 조흥은행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인데 투입된 공적자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워낙 강하던 시절이었다. 인수자(신한은행) 측에선 시장가격을 원하고, 정부는 장부가격을 원하는 간극이 컸다. 이때 잠재적으로 부실이 있는 조흥은행의 장부가를 현실적으로 계산하기 위해 인수가격 납입 시점을 조정하거나 매각대금을 상환전환우선주(RCPS)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낸 것이 당시 최 사무관이었다. 변양호 당시 금융정책국장, 추경호 은행과장의 큰 짐을 덜어준 아이디어였다.
2005년 무렵엔 삼성생명 관련 금융산업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의 해석이 큰 이슈였다. 최 단장은 사무관으로서 당시 김광수 금융정책과장(현 은행연합회장), 권대영 총괄서기관(현 금융위 상임위원)과 함께 이 문제를 풀어나갔다.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이동걸 당시 금융연구원 연구위원과 참여연대 등 외부에서는 삼성생명과 삼성카드의 삼성그룹 계열사 주식취득을 금융감독 당국이 문제삼지 않은 것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김 회장은 "당시 정부가 삼성그룹을 위해서 문제를 처리한다는 세간의 인식이 워낙 강해서 애를 먹었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최 사무관을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심없이' 일한다는 점만큼은 인정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금산법에 따라 초과지분 매각명령을 내리는 것의 위헌성을 조사해 보자는 최 사무관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법무법인들이 위헌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재경부와 금감위는 그해 말 금산법 초과지분을 매각하는 대신 의결권만 제한하는 내용의 금산법 개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현재까지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하지 않고 있는 근거가 된 조항이다. 여전히 논란의 여지도 있는 사안이지만, 민감한 문제를 냉정하게 다루는 그의 태도와 합리적인 견해는 많은 이들에게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중소기업 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 전자금융법 초안 등의 기틀을 잡는 데도 많은 역할을 했다. 청와대 대통령실 파견을 거쳐 금융시장분석과장으로 일할 때는 은행들의 CD금리 담합 이슈 대응, 코픽스 도입 등을 주도하며 매끄러운 일 처리로 주목받았다. 산업금융과장 시절에는 국책은행 자본확충펀드 등 당대의 굵직한 사안들을 도맡았다. 금융회사와 자본시장에서 예의 '칼 같은 스타일'을 두루 인정받았다.
그를 기억하는 선후배들과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은 최 단장의 '눈'이 높았다는 점이다.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나 기자들의 기사에 대해서도 방향이 잘못되거나 디테일이 틀린 부분을 명확하게 잡아내고 짚었다. 쓴 소리를 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디테일에 강한 만큼 윗사람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다. 그와 한번 합을 맞춘 윗사람은 꼭 그를 다시 찾는다는 말이 나온 배경이다. 금융위 출신인 이한진 김앤장 변호사는 "화를 내는 듯이 보이다가도 한 시간 후에는 그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거나 저렇게 고치면 된다고 알려주곤 했다"고 돌이켰다. 기자들에게도 잔소리를 자주 했으나 꼭 콜백을 하고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도록 일러주는 데 에너지를 아끼지 않았다. 빠른 두뇌회전과 따뜻한 성정을 함께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행시 통과 후 새내기 공무원이던 28년 전 처음으로 암이 발병한 것을 알게 됐다. 철저한 관리와 노력으로 당시에는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이후 지병이 있었다는 것도 외부에서는 알기 어려울 만큼 업무에 몰두하며 지냈다. 수년 전 다시 암이 재발했고, 몸이 회복된 후 업무에 복귀했으나 지난달부터 병세가 급격히 악화한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빈소에는 22일부터 24일 오전 발인까지 금융계 전현직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최상목 경제수석, 김주현 금융위원장 등 기획재정부(재경부)와 김석동 임종룡 최종구 고승범 전 금융위원장, 김태현 국민연금 이사장, 정은보 전 금융감독원장 등 금융위 출신 관계자들이 모두 한 자리에서 그를 애도했다. 이틀 연속, 사흘 연속으로 자리를 지킨 이들도 적잖았다. 24일 오전 발인 장소에서도 변양호 VIG파트너스(옛 보고펀드) 고문, 김광수 은행연합회장, 박정훈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전 금융정보분석원·FIU 원장) 등이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최 단장이 아까운 인물이었다며 침통해했다. 박민우 금융위 자본시장국장은 "행시는 내가 한 해 먼저 됐지만 그런 것과 상관 없이 언제나 최 단장이 '형'이었다"며 눈물을 비쳤다. 다른 이들의 마음도 모두 비슷했다.
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