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써 놓으면 촌스럽나?"…'논란의 영어 메뉴판' 근황 [여기잇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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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메뉴판' 내세운 카페 가보니
'필기체'에 일각서 불편함 잇따라
'한글 간판' 내세운 카페들 재평가
"콘셉트 이해" VS "한글 촌스럽냐"
메뉴판에 영어만을 기재해둔 한 베이커리 전문점. /사진=김세린 기자
최근 들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핫플'로 불리는 국내 유명 카페들이 한글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영어 메뉴판'만을 내세워 논란이 되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핫플'의 조건은 영어 내세우기냐", "'힙(hip)'한 카페의 조건은 '오직 영어만'이냐"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일부 카페들은 영어로 표기된 메뉴에 대한 이해와 구매에 혼란을 가져온다는 지적을 받으며 시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앞서 지난 5월 여러 언론보도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영어 메뉴판을 사용한 카페들이 한차례 논란이 된 바 있다. 25일 카페의 직원들에 "특별히 영어 메뉴판을 사용한 이유가 있냐"고 묻자, 대부분이 "'콘셉트'이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메뉴에 대한 한글 설명을 요구한 손님들이 많냐"는 질문에도 "매우 많다"고 답했다.
미숫가루를 'M.S.G.R'으로 표기하는 등 메뉴판에 영어만 담은 카페. /사진=김세린 기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대형 백화점 내 'C' 커피 전문점에서는 주문을 대기하던 한 손님이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직원에게 메뉴 설명을 요구하는 장면이 포착됐다. 이곳은 SNS에서 '힙'한 카페로 입소문이 난 곳이지만 별다른 한글 설명 없이 미숫가루를 'M.S.G.R'로, 오렌지주스를 'Range.O'로만 표기해 손님들의 혼란을 가져왔다. 직원은 해당 메뉴들에 대해 "손님들로부터 '이 메뉴는 도대체 정체가 뭐냐'는 말을 정말 정말 많이 듣는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매장 내 '1인 1음료'만 한글로 기재해 둔 한 베이커리 전문점의 메뉴판. /사진=김세린 기자
해당 백화점 내 'C' 베이커리 전문점에서도 전 메뉴가 영어로만 표기돼 있었다. 글씨는 전부 필기체로 작성돼 손님들 입장에선 "정확한 메뉴명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왔다. 디저트의 외관을 보고 맛과 종류를 유추해야 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 커플 손님이 디저트와 음료를 구매하려 방문했다가 "죄다 영어야"라고 손사래를 치며 돌아가는 장면도 포착됐다. 앞서 온라인에서 이곳은 음료 메뉴판 하단에만 '1인 1메뉴'와 관련된 설명을 한글로 적은 것이 알려져 "진짜 한글로 중요한 정보만 한글로 적은 것이냐"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L' 베이글 전문점 내 판매되는 모든 메뉴 설명이 영어로만 적힌 모습(왼쪽), 채용 공고마저도 영어로만 돼 있다(오른쪽). /사진=김세린 기자
종로구 삼청동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평균 3시간 30분~4시간을 기다려야지만 맛볼 수 있다는 'L' 베이글 전문점은 얼마 전 '팁(Tip)' 박스를 계산대 위에 설치해 논란이 된 곳이다. 이날 계산대에서는 팁 박스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베이글과 관련된 메뉴 설명은 전부 영어 필기체로 적혀있었고, 이국적인 콘셉트의 가게 인테리어를 포함해 외벽에 붙어있던 카페 직원 모집 공고마저도 별다른 한글 설명 없이 영어로 돼 있었다.다만 이곳에서 만난 시민들은 "이곳은 '유명한 베이글'을 사러 오는 목적이 크기 때문에, 영어가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대기 줄을 서 있던 한 대학생은 "모르겠으면 결국 직원에 물어보면 되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문제 될 일이 아니라고 본다"면서도 "낯가리시거나 어르신분들은 확실히 어려움을 느끼실 것 같다"고 했다. 베이글 구매 후 밖을 나서던 직장인 무리도 "영어 메뉴판을 사용해도 카페 분위기가 힙하고 좋으면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음료 메뉴판을 제외한 베이커리 전 메뉴가 영어로 적힌 모습. /사진=김세린 기자
매장 내 한글을 찾아볼 수 있으나 영어 메뉴판을 우선으로 내세운 곳들도 적지 않았다. 'ㅂ' 커피 전문점은 계산대 위쪽에 크게 내걸린 커피 메뉴와 커피 굿즈(MD) 상품 전부 영어로 표기돼있었고, 한글 설명은 계산대 쪽에만 작은 글씨로 기재돼있었다. 인근의 'ㅋ' 베이커리 전문점도 전 베이커리 메뉴가 전부 필기체로 된 영어로만 적혀있었고, 계산대 쪽 음료 메뉴판에만 영어로 된 글씨 옆에 보조 글씨로 한글이 작게 있었다.

한 시민은 방문 후기에 "'이 정도 영어도 읽지 못하면 먹을 자격이 없어'라고 으름장을 놓으며 '영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받지 않겠다'는 느낌"이라며 "모든 사람이 영어에 능통한 것도 아닌데도 이렇게 한 건 괜히 한글로 써 놓으면 촌스럽다고 느끼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한글 간판을 내세운 인사동 내 카페들의 모습. /사진=김세린 기자
이런 탓에 인근 인사동에서 내세운 한글 간판이 재평가받는 분위기다. 시민 안모 씨(46)는 "영어만 적힌 것보단 한글이 크고 시원하게 적힌 게 훨씬 예쁘고 좋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왔다는 앨런도 씨(30)도 "거리에 한글이 많아 보이면 확실히 한국에 왔다는 느낌이 든다"며 "영어로 적힌 걸 봐도, '와, 여기 느낌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지적했다. 옆에 있던 미카엘 씨(28)도 "영어가 난무한 곳들보다는 한글로 된 곳들이 더 눈에 띄고 매력적으로 느껴진다"고 평가했다.하지만 현행법상 카페 등 메뉴판에 한글 표기가 없어도 불법이 아니다. 옥외광고물법에 따르면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 맞춤법이나 국어의 로마자표기법, 외래어표기법 등에 맞춰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외국어로 기재하는 경우 한글을 병기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5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다만 식당 등 내부에서 손님에게만 제공하는 메뉴판은 옥외광고물에 해당하지 않아 법적으로 규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

이에 지난달 16일 조명희 국민의힘 의원은 카페와 음식점 등 대중 이용 시설에서 한글 안내판 및 메뉴판을 제공하도록 하는 내용의 국어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영어로만 작성된 메뉴판은 일상에서의 무분별한 외국어 사용으로 국어문화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지적이다. 조 의원은 "한글 안내판이나 메뉴판 마련을 권장해 국어 문화 확산과 국민 편의를 도모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세린 한경닷컴 기자 celin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