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딴 게 예술이냐" 팔순 개념미술 대가가 선보인 '망친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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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삼청동 갤러리현대서 전시 퍼포먼스“이딴 걸 누가 예술이라 하겠냐, 하지만 난 이걸 예술이라 주장한다.”
지난 22일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한국 개념미술의 대가 성능경(79)은 이렇게 외쳤다. 그러더니 "퍼포먼스를 보여주겠다"며 셔츠를 벗어 던졌다. 65년전 중학생 때 배운 스트레칭부터 보여주겠다더니, 다리찢기부터 팔벌려 뛰기까지 10여분간 분주하게 몸을 굴렸다.그걸 지켜보며 든 생각은 성능경의 말 마따나 ‘이딴 게 예술이냐’였다. 하지만 그는 1970년대부터 죽 이어온 이런 행위예술로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다. 이날 스트레칭도 그가 1970년대 사진으로 남긴 작품 ‘수축과 팽창’이었다. 성능경은 바닥에 바짝 드러누웠다 뜀뛰는 스트레칭 동작을 통해 민주주의가 억압받던 그 시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예술가의 무력감을 표현했다. 그리곤 자신의 동작 하나하나를 코닥 카메라로 찍어 남겼다. 성능경의 인생 담은 첫번째 ‘미니 회고전’
성능경의 예술과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가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1970년대 이후 그가 남긴 다양한 예술 사진들이 전시됐다. 전시 제목은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 실제 사진학적 관점에서 ‘망한 결과물’들이 많이 공개됐고, 그러다보니 이번에 처음 나온 작품들이 많다.갤러리현대는 글로벌 미술계의 '큰손'과 갤러리스트들이 모이는 한국 미술계 최대 이벤트 기간인 KIAF-프리즈 때 갤러리 본관을 성능경에게 내줬다. 해외 미술계에 한국 개념미술의 진수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성능경은 단색화가들이 화단을 지배하던 1970년대 초반, '실험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들고 나온 작가다.파격적인 행위예술을 하고, 그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 인화해 전시했다. 또 신문과 사진들을 잘라 붙이거나 그 위에 다시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 기존 매체들을 다른 시각으로 뒤집었다.
1990년대 들어 빛을 보게 된 그의 작업 앞엔 개념미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내 작품은 절대 팔리지 않을 걸로 생각했다”고 했다. '한국 최고 개념미술 작가'란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게 이번 개인전은 그의 세 번째 상업화랑 전시다. 대표작은 1층 입구 전체를 차지한 ‘현장 시리즈’다. 성능경이 신문을 읽으며 신문 속 보도사진을 오린 후 그 위에 세필묵으로 하얗게 그림을 그린 작품이다.
젊은 시절의 성능경은 신문을 읽으며 사진기자와 편집자의 의도가 담긴 보도사진에 지루함을 느꼈다. 그는 그 사진을 찢고 오려내 위에 그림을 그리며 그들의 의도를 깨는 일탈을 일삼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그렇게 쌓인 수많은 신문 쪼가리들을 모아 ‘현장’ 시리즈를 낳았다.
‘이름 짓기 퍼포먼스’ … 예상을 부수는 작가공개 당일, 현장 시리즈 전시장 공간 가운데 선 작가 성능경은 갑자기 메고 있던 가방을 뒤졌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연필 한 자루와 선글라스. 그리고 핑크색 격자 무늬의 샤워캡이었다. 그는 이윽고 선글라스와 샤워캡을 쓰더니 “지금부터 작명 퍼포먼스를 선보이겠다”고 선포하듯 소리쳤다.
많은 작가들은 “그림 그리는 것보다 제목 붙이는 게 더 힘들다”고 말한다. 작품 의도와 특징을 한눈에 보여주는 제목을 다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성능경은 달랐다. 연필 한 자루를 들더니 자신의 작품들이 걸린 벽으로 성큼 다가섰다.그리곤 사진을 보고 떠오르는 대로 작명하기 시작했다. 그는 깨끗한 흰색 벽에 연필로 낙서하듯 작품 이름을 끄적였다. 이름을 붙이다가 갑자기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글자에 줄을 긋곤 새로운 제목을 다시 적었다.
작명 방법은 직관적이다. 어떤 숨겨진 의미도 없다. 엄마와 아들이 찍힌 보도사진에는 ‘모자’라는 이름을 짓거나, 당시 기후를 보여주려 기자가 찍은 사진에는 뒤에 야구장이 보인다는 이유로 ‘잠실야구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74년부터 2023년까지 이어 온 ‘신문 읽기’
성능경은 이렇게 퍼포먼스와 행위예술을 30년 넘게 이어왔다. 국내 작가로서는 거의 유일하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각자 다른 부분의 신문을 읽는 '신문 읽기 퍼포먼스'는 성능경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1974년 시작한 이 퍼포먼스는 올해로 50년을 맞았다. 이 퍼포먼스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사람들이 모여 큰 소리로 신문을 읽는 것 자체만으로 이슈가 됐다. 이후 성능경은 한국 전위미술의 선구자가 됐다. 1976년 연 두 번째 '신문 읽기'에서는 신문을 계속 오려내는 퍼포먼스로 다시 주목 받았다. 성능경은 신문 읽기 퍼포먼스를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있다.
성능경의 새로운 신문 읽기는 9월 6일 열린다. 서울 고덕동에서 역대 최다 인원은 100명과 함께 신문 읽기에 나선다. 이번 퍼포먼스는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가 성능경을 직접 설득한 끝에 성사됐다. 색다른 시도를 위해 이번 작업엔 외국인만 참가한다. 다양한 언어로 각자 준비해 온 신문을 성능경의 선창으로 읽어 나간다. 간담회 중 한 기자가 성능경에게 “성능경에게 예술은 과연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졌다. 그가 내놓은 답은 “몰라”였다. 그에게 예술은 미궁과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항상 질문해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모두가 아는 예술은 개념예술가에겐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모르는 것이 힘"이라고 했다.전시는 10월 8일까지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열린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