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음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밀레니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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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동휘의 탐나는 책2000년 1월 1일 0시 0분 1초, 대한민국 최초의 ‘밀레니엄 베이비’가 탄생했다. 우리말로 ‘즈믄둥이’. 한 해 전부터 무려 국가 차원에서 ‘새천년준비위원회’라는 대통령 직속 기구가 만들어졌고, 당일에는 전국 주요 산부인과 분만실에 실시간 카메라와 인터넷 중계 시스템까지 갖춰놓고서 누가누가 진짜 ‘첫’ 밀레니엄 베이비인지 관찰했으며, 당시 태명 ‘바위’였던 아이는 (역시 국가 차원에서) 그 주인공으로 인증을 받았다. 물론 벌써 옛날 일이다. 그 이름 밀레니엄 ‘베이비’였지만, 베이비도 보이가 되고 가이도 되는 법이니까, (그의 정확한 근황은 알 수 없으나) 올해 벌써 23세의 성인이 되었겠다.
『밀레니얼의 마음』
강덕구 지음, 민음사
2022년 11월 30일
그런데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딴지를 걸고 싶은 점이 있는데, 진짜 ‘뉴 밀레니엄’은 2001년 1월 1일이 아닌가 하는 거다. 21세기는 2000년이 아니라 2001년부터 2100년까지이건만, 왜 밀레니엄은 2000년에 시작해버렸는가. 실제로 ‘세 번째 밀레니엄(the third millenium)’이라고 하면 확실히 2001년부터 3000년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올해 23세의 ‘바위’(가 태명이었던 모) 선생님께 어떤 자격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은 물론 아니고, 실은 나의 아주 사적인 기준 문제와 관련이 있어서다. 필자인 나는 1990년에 태어났는데, 그렇다면 나는 90년대생이 맞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 말이다. 요컨대 1990년생이란 80년대의 문을 닫고 나온 것인가, 아니면 90년대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인가.비슷한 난처함을 느끼는 규정은 또 있다. ‘MZ세대’라는 말. 많은 이가 지적하듯, 80년대생부터 2000년대생까지를 아우르는 MZ세대의 범위는 지나치게 넓기도 모호하기도 한데, 그중에서도 1990년 출생자로서 나는 M인가 Z인가 또 다시 고민에 빠진다. 이건 아주 구체적인 정체성의 위기다.
영미권 인구통계학을 참고하면 Z세대는 1990년대 ‘후반’ 출생부터다. 그 주요 근거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삼는다고 하니까, 스무 살에야 처음 스마트폰을 접한 입장에서 내가 Z세대가 될 수 없음은 수긍할 만하다. 그럼에도 나 또한 같은 90년대생이긴 함에 생각이 미칠 때면 왜인지 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이것은 일종의 소외감일까? 혹 너무 일찍 ‘뉴 제너레이션’에서 쫓겨난 삼십대의 섭섭함일까? 어쩌면 그저 Z세대에 끼고 싶어하는 밀레니얼의 아등바등인가? 무엇인가 나도 몰라, 알 수 없는 이 마음…….글을 장황하게 전개하고 보니, 그러니까 내가 1990년생이라는 사실을 이렇게나 거듭 늘어놓고 나니, 이쯤에서 아무래도 ‘사설이 길었다’라고 써야 할 것 같다. 아주 관성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번 글에서만큼은 ‘모든 공적인 담론은 사적 고백, 혹은 회고에서 출발하는 법’이라고 변명 겸 선언을 해두련다. 나는 지금 『밀레니얼의 마음』을 읽은 직후니까.책의 저자 강덕구 평론가는 1992년생이다. 나보다는 비교적 ‘확실한’ 90년대생이지만, M인지 Z인지 여부 문제에선 좀 더 경계에 가까울 것 같다. 그는 “실은 밀레니얼세대도 밀레니얼세대를 잘 모른다”(15쪽)고 고백한다. 그래서인지 글을 시작하는 자문 또한 이렇다. “2010년대를 회고하는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자문 뒤에 자답이 바로 온다. 물론, “할 수 있다.”(8쪽) 상당히 호기로운 선언이다.
대개 세대론은 세대 밖에서 쓰이는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그 시기를 벗어난 이후, 요컨대 ‘지나고 봐야’ 규정할 수 있다. 주체로서는 당사자가 아닌 외부의 시선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타자화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밀레니얼인 저자는, 그러므로 밀레니얼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밀레니얼이 겪는 불행이란, 망망대해 같은 우주에서 길을 잃고 미아가 된 우주 탐사선” 같은 것, 즉 “밀레니얼은 밀레니얼이 사는 세계의 ‘이방인’이”므로.(15쪽)자칫 ‘밀레니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사회(혹은 시대) 비평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굳이 분류한다면 이것은 회고록이다. 살아 있는, 심지어 ‘젊은’ 사람의 회고록. 자신이 겪은 일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글. ‘소리바다’나 ‘벅스뮤직’이 스트리밍 서비스로 개편되고, 트위터에선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나고, 아트선재 시네마테크에선 고다르 특별전에다 와인 시음회를 이어 붙인다.
그 시절, 그러니까 “상실된 미래와 잊힌 과거가 현재로 유령처럼 투사되는 엉망진창의 난장판”(122쪽)을 지나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구체적이고 사적인 기록이 아니라면, 누가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밀레니얼’이라는 가상의 이미지, 임의의 정의에 어떻게 맞서며 무엇으로 검증할 텐가 말이다.사적 증언 없이 공적 담론을 만들 순 없다.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주 사적인 나의 이야기를 증언하는 것이다. 때로는 잡설처럼, 가능하면 넋두리처럼. 써놓고 보면 무척 당연한 이 사실을, 『밀레니얼의 마음』을 읽기 전까지 나는 몰랐던 것 같다. 나는 무엇인가. 나의 2010년대, 혹은 지금 진행 중인 2020년대는 어떤 의미인가. 물론 이 또한 잘 모르겠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 나의 마음, ‘밀레니얼의 마음’인지도. 그러나 “모른다”고 말하는 것 또한 하나의 증언이다. 불안과 변덕, 충동과 무지 역시 지금 나의 진실이고 우리 세대의 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