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부가 난 치듯 팥을 치고, 콩으로 섬을 짓는 정정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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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엽은 콩과 팥을 캔버스 위에 그리는 작가다. 이를 통해 곡식, 벌레, 먹는 풀등 우리와 공존하고 있는 생명들의 이야기와 위기의식을 보여준다. 이들을 뒷받침하는 건 여성들의 노동이다. 페인팅 작업과 함께 퍼포먼스, 예술행동 등 다방면의 작업을 병행 중이다.

미술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작가인 그는 이화여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30년 넘게 화업을 이어왔다. 2018년 고암미술상과 2020년 양성평등문화인상, 2022년 이중섭미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서울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을 비롯해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등 국내외 유수 기관에서 소장 중이다.
정 작가는 “콩은 움직이는 점이어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안료 묻은 붓을 캔버스에 찍고, 오일로 닦아내길 수십 번 반복한다. 문질러서 번지듯 그려내 입체감을 준다. 밝은 물감을 덧칠해 입체감을 주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이미 그린 것을 오일로 지워내면서 여백을 만들어 생동감을 준다. 그의 작품은 구상이자 추상이다. 작가는 콩과 팥을 한 알 한 알 구상화처럼 그리지만, 캔버스 전체를 바라보면 추상 또는 반추상 작품이 된다.

노란콩, 검은콩, 녹두, 완두, 붉은 팥 등을 다채롭게 그리는 그는 “콩류는 이 땅의 모든 빛과 색을 갖고 있다. 철학적이고 개념적인 색이 아니라 먹어서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그런 색들”이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하찮게 여겨졌던 여성의 살림 노동과 이유 없이 혐오의 대상이 된 벌레 등을 조명해 생명의 숭고함을 드러내고 편견을 한 꺼풀 벗겨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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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KIAF 서울 2023 하이라이트에 출품할 작품에 대해 정 작가는 "가장 구체적인 콩 한알이 모이고 흩어지며 일상과 상상이 만나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섬세하고 밀도 있는 그리기의 원초적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공력을 쏟아 오랜 시간 작품을 그리기로 유명하지만, 그는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정 작가는 "다른 모든 직업도 힘든 건 마찬가지"라며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언가가 나를 이끌고 간다"고 했다. 목표는 자신이 만족할 만한 작업을 만드는 것. "지구 상의 많은 생명들이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공멸로 가고 있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두렵다. 섬세하고 연약한 존재들을 더듬어가는 수밖에 없다."

작품에 담은 사명감이나 위기 의식과 별개로, 그는 "관객들이 KIAF 하이라이트 전시와 내 작품에서 즐거움과 자유로움을 느꼈으면 한다"고 했다. "예술의 즐거움과 진통이 느껴지는 축제가 되면 좋겠습니다.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네요."
(Exhibition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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