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치명적이다, '오펜하이머'의 플로렌스 퓨

[arte] 오동진의 여배우 열전-플로렌스 퓨
영화 '레이디 멕베스'
플로렌스 퓨를 두고 글을 쓸 때는 말을 조심하자고 생각했다.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27살이다. 1996년생. 와우. 근데 지금껏 한 연기를 보면 40은 가까워 보인다. 노련하다. 연기와 자태 모두가.

특히 이번 ‘오펜하이머’에서의 능숙한 베드 신은 그녀가 거리낌없이 연기 혼을 불태우는, 제대로 된 스피릿의 여배우임을 입증한다. 특히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증 청문회 모습에서 그가 환상으로 보고 느끼는 진 태트록의 누드와 그녀가 주도하는 섹스 신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 대한 입소문이 학부모 관객들로 하여금 청소년 자녀들과의 동반 관람을 망설이게 만들었을 정도다.플로렌스 퓨의 몸은 그다지 아름답다고 말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서 차라리 사실적이다. 매우 리얼하다. 늘 사실과 진실은 위험한 법이다. 플로렌스 퓨의 몸은 그래서, 위험하다. 그녀는 치명적인 매력의 존재이다. 인기도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다.
영화 '오펜하이머'
사람들, 남자든 여자든, 부부와 연인의 삶이라면 샤를리즈 테론과 같은 서구형의, 신의 손길이 닿은 것 같은 미녀와의 그것을 꿈꾸게 만들기 마련이다. 같이 사는 여자는 절세 미녀이길 원한다. 여자도 같이 사는 남자가 정우성이나 이정재가 되기를 동경한다. 그러나 실제 삶은 그 반대이다. 내가 사는 여자 혹은 남자는 플로렌스 퓨처럼 ‘뭉툭한’ 몸매, ‘납작한’ 가슴의 여자이기 십상이다. 거꾸로 상대가 남자일 겨우 장신의 근육질 몸이 아니라 배가 좀 나왔거나 머리가 빠진 남자일 수 있다. 그게 리얼이다.

‘오펜하이머’에서도 오펜하이머가 왜 키티(에밀리 브론트)보다 진 태트록에게 빠졌는지 언뜻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진이 지닌 도발성, 진보주의적 감성, 지력 등등을 생각하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것은 나에 대한 상대의 집중도, 그 열정일 수 있다. 플로렌스 퓨는 나를 위해 불 섶에라도 뛰어 들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그런 파트너는 일생에서 딱 한 번 정도 만난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관계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플로렌스 퓨는 데뷔작 아닌 데뷔작 ‘레이디 멕베스’에서(그녀의 데뷔작은 ‘폴링’이라는 청소년 호러물이다.) 이미 스타성을 강력하게 보여줌으로써 세계 영화 덕후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러시아 문학의 대문호(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쓴 『러시아의 멕베스 부인』을 영국 윌리엄 올드로이드가 각색 연출한 영화이다.

배경을 러시아에서 영국 변방으로 가져 온 만큼 소설의 뒷 부분까지 거의 다 바꾸면서 영화를 미스터리 살인극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게 더 영화적이긴 했다. 여기서도 퓨는 흑인(원작에서는 농노) 하인과 벌이게 될 자신의 정염을 위해 코르셋 끈을 ‘훌렁훌렁’ 풀어 던진다. 19세기 빅토리아 왕조 시대의 성(性)에 대한 금기, 그 정치사회적 규제의 상징을 벗어 던지려는 한 여자의 극단적 선택을 보여 주는 내용이다.

주인공 캐서린은 어쩌지 못하는 육욕, 그것을 억압하는 집안의 모든 가부장 남성을 향해 불륜 하인과 음모를 꾸민다. 그녀는 사실상 모두를 죽여 버린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이해 못할 바가 못된다. 여자의 범죄가 여자에게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한다. 시대와 세상이 여성성을 죽이고 억압해 온 행위는 이루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플로렌스 퓨 하면 그녀의 출세작 격인 ‘미드 소마’와 ‘블랙 위도우’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그녀의 본색이 제대로 나오는 것은 그보다는 다음의 세 편이다. ‘원더’와 ‘작은 아씨들’ 그리고 박찬욱의 ‘위대한’ 6부작 방송 드라마로 ‘미드 소마’ 1년 전에 나왔던 ‘리틀 드러머 걸’이다.

‘리틀 드러머 걸’은 박찬욱이 얼마나 배우들을 발견해 내는데 뛰어난지, 영화감독이란 자신의 페르소나 격인 여배우를 어떻게 바꿔 내는 인물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플로렌스 퓨가 여지껏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무명에서 유명으로, 영국이라는 로컬에서 글로벌 배우로, A급 정도에서 특A급이나 슈퍼 스타 급으로 올라 선 데에는 이 ‘리틀 드러머 걸’과 박찬욱 감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독파하기 힘든 것으로 유명한 존 르 카레의 원작을 박찬욱이 완벽에 가깝게 해석 · 재해석 해 낸 이 드라마는 반 이스라엘 테러 단체에 잠입하기 위해 스파이가 되는 여자 찰리의 이야기이다. 찰리는 스파이가 되기 위해 스파이를 뛰어 넘는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예 바꾼다. 그녀가 무슬림 테러단체의 남자를 진짜 사랑하는(지 그게 아닌지도 헷갈리게 되는) 이유이다. 존 르 카레는 스파이 세계에 살아 가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대해 늘 얘기해 온 작가이고 박찬욱 역시 흔들리는 정체성을 주요 테마로 다뤄 온 영화 작가이다. 플로렌스 퓨는 이 두 대가가 빚은 캐릭터 찰리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영화 '작은아씨들'
영화 ‘바비’로 전 세계에서 10억 달러 이상을 벌어 들이며 초 슈퍼 감독이 된 그레타 거윅의 2019년 영화 ‘작은 아씨들’은 루이자 메이 올콧의 동명원작을 마치 가문의 둘째 딸 조(시얼샤 로난) 중심에서 셋째 딸인 메그(플로렌스 퓨)의 시선으로 옮긴 작품이다. 화가 지망의 자유분방함과 독립성이 강한 비혼주의자의 모습(메그는 결국 나중에는 로리 역의 티모시 살라메와 결혼하지만)을 표현하는데 퓨 만한 배우가 없다는 것이 배우이자 감독인 그레타 거윅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영화 '더 원더'
국내에는 넷플릭스로 소개됐던 아르헨티나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의 2022년작 ‘더 원더’도 플로렌스 퓨가 뛰어난 배우임을 다시 한번 입증해 준 작품이다. 렐리오 감독은 ‘판타스틱 우먼’이나 ‘글로리아 벨’처럼 트랜스 젠더와 노년의 여성 등이 주인공인 비주류 급 러브 스토리 텔링에 능한 인물이다. 그만큼 사회적 정치적 금기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온 인물이다.

‘더 원더’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감자 대 기근의 아수라장이 벌어진 1860년대의 언제쯤 아일랜드 외딴 마을에서 수개월의 금식으로 하늘의 기적을 구현한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돼야 한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신성시 되)는 한 여자 아이를 돌보기 위해 크림전쟁에서 돌아 온 잉글랜드의 한 간호사가 배정된다. 플로렌스 퓨이다. 그녀는 이때부터 마을의 이상한 비과학적 맹신과 권위에 맞서 싸워 나가기 시작한다. 역시 퓨가 아니면 아무도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역할이다.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는 어디서 본 듯한 작품을 만들기 보다는 오리지낼리티가 강한 작품을 만들 때 비로소 세계적 명성을 얻는다. 배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자기 만의 연기력을 펼칠 때, 그래서 이 역은 그 배우 아니면 아무도 못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 그때에야 비로소 최고의 스타가 되는 법이다.플로렌스 퓨가 딱 그런 배우이다. 근데 너무 빠른 거 아닐까? 27살은 너무 젊고 어리다. 플로렌스 퓨가 40살이 되고 50살이 됐을 때는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뭉툭한 허리가 드럼통만 해질 수도 있겠다. 그건 상관이 없다. 그녀가 동 시대에 우리와 오래 함께 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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