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총리실 '의경 해프닝'…이대로 돌아서면 아무 일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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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악범 창궐, 시민 불안에도한덕수 국무총리가 강력범죄 단속을 위한 의무경찰제 재도입을 거론했다가 슬그머니 접었다. 기왕 ‘의경 부활’ 카드를 꺼냈으면 제대로 논쟁을 벌여볼 만했는데, 병력 부족 문제를 들고나온 국방부 반대가 부담스러웠던지 맥없이 물러서버렸다. 실망스러운 후퇴다. 국가적으로 매년 줄어드는 청년 인력의 전략적 배치와 활용을 공론화할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총리실은 향후 치안 상황을 봐서 다시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이런 문제에 ‘나중에’라는 것은 없다. 청년 인구 격감을 동반하는 저출생은 치안과 안보 모두에 궤멸적 리스크를 몰고 오는 중이다. 2014년 38만 명에 달했던 만 20세 남성 인구는 올해 25만 명대로 주저앉았다. 현재 군병력(48만 명)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치 아래다. 지난해 태어난 남아들이 20세가 되는 2042년엔 12만 명으로 격감한다. 병력 8000명을 의경으로 전환하는 데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국방부의 사정도 이해가 간다. 아무리 군사장비가 전자화·원격화되고 있다지만 남북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선 병력 숫자가 중요하다. 더욱이 북한군은 100만 명이 넘는다. 지상군의 수적 가치는 지척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청년 인구 부족으로
의경 8000명도 못만드는 나라
진작부터 예고된 인구재앙
치안·안보에도 심각한 타격
복무기간 연장, 용병 고용 등
지금부터 모든 대안 검토해야
조일훈 논설실장
경찰도 젊은 인력들의 이탈과 미충원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재 경찰 인력은 13만 명대. 20~30대 직원은 5만 명대로 그중에 남자 비율이 70% 정도다. 이 남성들이 갈수록 귀해지고 있다. 일선 치안을 담당하는 지구대·파출소의 절반가량은 정원도 채우지 못하고 있다. 박봉에 거친 업무가 많아 5년간 그만둔 하위직 경찰이 4000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가운데 길거리 범죄, 대낮 칼부림, 묻지마 폭행 같은 흉악범죄는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어둠 속으로 숨지 않고 카메라도 겁내지 않는 강력범죄는 우리 주변의 안전지대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산업화·민주화·디지털화 성공으로 선진국 문턱에 다다른 한국이 뜻밖에도 ‘스릴러 코리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줄 누가 예상했겠나. 강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나라는 없다. 결코 교화되지 않는 악한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범죄의 원인과 성격 모두 제각각이어서 맞춤형 대책을 마련하기는 어렵다. 그저 열심히 예방활동을 하면서 검거율을 높이고 범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기동성을 갖춘 현장 인력 증원이 불가피하다.그런데 앞으로 어디서 그런 인력을 구하나. 이번 기회에 미래 소수의 청년 인력을 어떻게 사회 곳곳에 조직화할 것이며, 부족한 인력은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10년 뒤 본격화할 ‘청년인구 절벽’에 대응할 길이 없다. 군 병력 결손에 대비하려면 사전에 복무기간을 늘려놓거나, 여성 인력 활용과 모병제를 병행하거나 아니면 해외 용병을 고용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 같이 정치적으로 인기가 없거나 재정적 부담이 큰 대안이지만 다른 수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하기 위한 공론화 작업이 더 중요하다. 일단 모병제가 유력한 대안이지만 충분히 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뽑기 어렵다. 독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용병을 쓰는 이유다. 우리도 해외 용병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다. “용병은 애국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오히려 직업 군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은 국민병을 능가한다는 실증적 사례도 많이 있다. 해외 젊은 인력들이 5년 안팎의 복무를 마치고 우리 사회에 정착한다면 청년 인구 감소에 따른 국가적 부담도 덜 수 있다. 군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과 기술로 산업현장에 활용할 길도 있을 것이다. 군 복무기간 중에 군사훈련뿐만 아니라 첨단 통신기술, 컴퓨터 프로그램 등의 취업·창업교육까지 받는 이스라엘 청년들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한 총리의 의경 제언 무산이 아쉬운 이유는 부처 간 사전 조율이 없어서가 아니다. 어떤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한 대책이 걸림돌을 만나면 그 걸림돌까지 묶어서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입체적 노력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리 직속 국무조정실은 지금이라도 사회적 논의를 시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중요한 의제를 미루고 회피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청년 격감은 굳어진 미래다. 10년 뒤에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다음 총리, 다음 정부로 미룰 일이 아니다. 인구구조 방향만 놓고 보면 ‘한국은 이미 망한 나라’라는 자조가 나오는 판국이다. 망한다는데 못 할 게 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