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혈 묻은 옷 빨다가 회의 지각…창업 결심한 女 [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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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대 변기에 버리세요"
국문과 출신 창업가가 '500억 매출' 자신한 비결
2017년 생리대 안전성 파동 이후 5년간 270개의 신규 생리대 제품이 쏟아졌지만, 브랜드 시장 점유율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차별성 없는 브랜드들로 경쟁만 심화됐고, 생리대는 별다른 발전 없이 몇 겹의 부직포와 비닐을 접착한 구조에서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 가임기 여성들이 모두 사용하는 생필품이지만, 수십 년째 발전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시장을 새롭게 개척하려는 스타트업이 있습니다. 한경 긱스(Geeks)가 김지연 어라운드바디 대표를 만났습니다."스마트폰 시대인데 생리대는 왜 '삐삐' 시절에 머물러 있는 걸까요?"김지연 어라운드바디 대표(사진)는 발전이 더뎠던 생리대 시장을 바꾸기로 했다. 양산형 생리대가 세상에 나온 건 100년도 더 된 일이지만, 100년 전의 그것과 지금의 생리대는 별 다를 게 없다. 김 대표는 몇 년 전만 해도 생리를 감추려고 하는 문화 탓에 생리대 산업도 기술적인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양지'에서 논의됐다면 "진작에 발전했어야 하는 제품이 생리대"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래서 4년차 스타트업 어라운드바디가 내놓은 건 물에 녹는 '플러셔블 생리대'다. 변기에 넣고 내려도 문제가 없다. 특허받은 자체 개발한 펄프 소재 덕분이다. 사용한 제품을 말지 않고 그대로 변기에 버리면 원단이 분해되면서 막힘없이 정화조로 흘러가고, 혐기성 세균들에 의해 분해된다. 원단이 물에 녹지만, 혈액에 녹지는 않는다. 이 제품은 지난해 미국 최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인 '킥스타터'에서 목표금액의 423%를 끌어모았다. 이달 양산이 시작돼 연내 시중에서 제품을 만날 수 있을 전망이다.
변기에 내릴 수 있다는 '편의성'에만 집중한 게 아니다. 회사가 내놓은 제품은 '친환경'이란 경쟁력을 갖췄다. 비닐 대신 펄프를 쓴 덕분이다. 오랫동안 땅에서 분해되지 않는 플라스틱 비닐을 없앴다. 그러면서도 피가 새는 걸 막는 방수성을 기존 비닐을 사용한 제품만큼 높였다. 향균 기능을 넣은 소재도 선보였다. 나중에는 생리혈을 활용해 질병을 진단하는 의료기기 시장으로도 무대를 넓힐 계획이다.
국문과 출신 '자유로운 영혼'이 창업에 뛰어든 이유
김 대표의 이력은 특이한 편이다. 원래는 소설가가 꿈이었다. 글쓰기가 좋았다. 고려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물론 날고 기는 '글쟁이'들 사이에서 등단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밥벌이를 위해 방송작가가 됐다. '인간극장'의 작가로 활약했고, '생생정보통' 팀에 몸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2년 정도 작가 생활을 했지만, 자유로운 영혼이던 그는 방송이라는 포맷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우선 전문성을 길러야겠다 싶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국어교육 자격증을 딴 뒤 고려대 한국어센터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문체부 산하 공공기관에 들어가 해외 대학에 한국어학과를 만드는 일을 돕기도 했다. 김 대표는 "점점 나이는 들어가고 있었고 주변 친구들은 다 자리를 잡았는데 나만 뒤쳐지는 기분이었다"며 "공공기관 특유의 비효율적인 일처리 방식도 성향과 맞지 않았다"고 회상했다.사기업은 좀 다를까 싶어 한 제약사 인사팀에 신입 공채로 들어갔다. 나이 많은 신입사원을 조직에서는 그리 반기지 않았다. 어느날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자료들을 챙겨야 했다. 화장실에서 다급하게 생리대를 갈다가 사달이 났다. 피가 묻어 블라우스와 치마가 엉망이 됐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급한대로 옷을 빨다가 회의에 늦고 말았다. 돌아온 건 '회사가 편한가보네~'라는 팀장의 조롱섞인 말이었다.
서러움에 눈물을 펑펑 쏟을 수도 있었지만, 김 대표는 이 때 창업을 결심했다. 물에 녹는 생리대, 변기에 버릴 수 있는 생리대는 왜 없을까 고민했다. 회의 내내 비슷한 제품이 세상에 나온 게 없을까 검색해봤다. 머릿속엔 이미 회의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없으면 '내가 만들어야지'라고 되뇌었다.
창업을 하겠다고 했지만 국문과 출신인 그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고, 부모님은 한 직장에 '진득'하게 자리잡지 못하는 그를 반쯤 포기했다. 김 대표는 "모아둔 돈이 금방 바닥나서 온라인으로 옷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며 "그래도 창업을 하는 게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내게 어울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비타민 음료 사들고 '헤딩'
시작은 막막했다. 기술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했다. 우선 친환경 원단으로 강력한 방수력을 가질 수 있는 소재가 펄프란 걸 깨달은 뒤엔 무작정 소재 관련 논문을 200편 이상 뒤져가며 공부했다. 밤낮없이 매달리자 내용들이 머릿속에 점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땐 '비타500' 음료를 사들고 전국 대학교 제지공학과 연구실을 찾아갔다. 그는 "다행히 스타트업 창업가라고 하니까 교수님들이 대부분 반겨주셨다"고 귀띔했다.그 즈음 인연이 된 사람이 유정용 강원대 교수였다. 찾아갈 때마다 화이트보드를 펴놓고 '문돌이' 출신인 김 대표를 위해 한 시간 넘게 화학식부터 차근차근 알려주곤 했다. 이 인연으로 기름막을 활용한 천연 펄프 소재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유 교수 연구팀이 갖고 있던 특허를 이전받아오기도 했다. 유 교수는 제품 생산 총괄까지 맡았는데, 김 대표 입장에선 은인인 셈이다.
2020년 법인 설립과 동시에 고려대기술지주로부터 시드 투자를 받았다. 하지만 소재를 개발한 뒤에도 시련의 연속이었다. 소재를 활용해 제품을 생산(OEM)해줄 공장을 찾아야하는데, 국내엔 마땅한 곳이 없었다. 기존 제품들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공정은 친환경 펄프 소재로 생리대를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아서다. 겨우 일본과 중국에서 생산이 가능한 곳을 찾았는데, 마침 코로나19가 터졌다. 김 대표는 "소재를 해외로 보내야하는데, 뱃길도 하늘길도 막혀서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투자금도 바닥났고, 돈이 없어서 창업 초기 멤버들에게도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고해야 했다. 다행히 회사의 아이템 자체는 인정받았다. 몇 달 뒤 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두 번째 투자를 유치했고, 올해엔 액셀러레이터(AC) 블루포인트로부터 프리 시리즈A 투자금을 받았다.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오를 수 있던 원동력이다.
"5년 뒤 500억 매출"
김 대표는 이 시장에서 회사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이 여럿 있다고 봤다. 가장 강력한 건 소재 기술력이다. 그는 "플러셔블 제품은 킴벌리에서 만들어 멕시코에서 판매되는 제품이 있긴 하지만, 방수력이 부족해 혹평이 대다수"라며 "방수력과 수분해성은 상충되는 조건인데, 둘 다 갖추기는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그는 대기업이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구조가 혁신을 막고 있다고 판단했다. 2017년 생리대 안전성 파동이 일어난 이후 신제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지만, 차별성 없는 제품이 대다수인 탓에 시장 점유율은 큰 변동이 없는 상황이다. 김 대표는 "몇 겹의 비닐과 부직포만으로 구성된 생리대는 변함이 없다"며 "대기업이 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 생리대 시장은 포화됐지만, 회사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플러셔블 같은 제품은 전에 없던 것이고, 전 세계 여성들이 이를 한 번씩만 쓴다고 가정해도 엄청나게 큰 시장"이라고 설명했다. 회사는 이제 OEM을 넘어 제조업자개발생산(ODM) 방식을 노리고 있다. 투자금을 기반으로 자체 제조설비까지 구축한 덕분이다. 특허 펄프 소재를 적용할 수 있는 공정이 한정돼 있는 탓에 제품 생산을 원하는 기업들의 '러브콜'이 벌써부터 몰리고 있다는 게 김 대표의 말이다. 이를 기반으로 2년 내 100억원, 5년 내 500억원의 매출 목표를 세웠다. 전 세계 여성들이 알고 있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한다는 포부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