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속으로 곪아가는 공직사회

좌동욱 증권부 차장
최근 부처 사무관들이 올리는 결재 문서엔 ‘과수, 국수, 차수, 장수’ 중 하나가 꼬리표처럼 달린다고 한다. 한 정부 부처 차관이 ‘무슨 의미냐’고 물었더니, 과수는 담당 과장이 보고서를 수정했다는 의미라는 답을 들었다. 국수는 국장, 차수는 차관, 장수는 장관이 고친 보고서라는 것이다. 이 차관은 “보고서를 수정하면 그 책임이 문서에 고스란히 남는데, 굳이 상관이 손을 대려 하겠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공직 사회가 전례 없이 움츠러드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전임 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공직자들이 잇따르자 이런 경향이 더 강해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민감한 사안이라면 일하는 시늉만 하고, 규제 완화처럼 사후 책임을 져야 할 일은 후임자 몫으로 미루려 한다.

민감한 정책은 일단 미룬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7월 발표한 ‘은행권 경쟁 촉진 방안’을 보면 고장 난 공직 시스템을 엿볼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월 “은행 산업의 과점 폐해가 큰 만큼 실질적인 경쟁 시스템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뒤 나온 대책이다. 경쟁 촉진을 위한 핵심 대책은 지방은행인 대구은행을 시중은행으로 전환하는 방안이다. 국민·하나·신한·우리·농협 등 5대 시중은행 과점 체제를 허물 ‘메기’ 역할을 지방은행에 맡기겠다는 의도인데, 금융권 반응은 차갑다. “7분의 1 수준에 불과한 덩치(자산 기준)로 어떻게 시중은행과 경쟁할 수 있냐”는 것이다. 금산분리 규제 완화 등 실효성 있는 방안은 죄다 장기 과제로 밀렸다. 벤치마크 대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미국에선 이미 애플과 골드만삭스가 서로 손잡고 신용카드와 저축 예금을 출시하고 있다.

이런 공직 사회의 복지부동으로 정작 피해를 보는 건 대개 민간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내부통제 소홀’을 이유로 줄줄이 중징계당한 금융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대표적이다.

민간으로 향하는 피해

첫 사례는 2018년 4월 직원들의 배당 사고에 대해 책임졌던 구성훈 당시 삼성증권 사장이었다. 사장 취임 보름여 만에 터진 사고로 ‘직무정지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처벌 수위가 과도하다는 의견을 내면 ‘삼성 장학생’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입바른 소리를 한 금융당국 인사들은 당해 인사에서 모두 불이익을 받았다. 이후 금융당국 내부에서 징계 수위를 다투는 논의가 거의 사라졌다. 내부통제 기준과 책임 소재를 법률로 분명히 해야 한다는 의견도 ‘쏙’ 들어갔다. 문재인 정부에서 중징계받은 CEO가 크게 늘어난 이유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내부통제 소홀’은 금융사 CEO를 처벌하는 ‘전가의 보도’로 쓰이고 있다.

공무원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 하지만 정책적 판단을 했거나 상급자 지시를 따랐다는 이유로 징계나 처벌을 하는 것은 부작용이 많다. 최근 들어선 고위 관료뿐 아니라 사무관(산업통상자원부), 과장(방송통신위원회) 등도 형사처벌을 받는 사례가 나오고 있어 걱정스럽다. 이런 분위기에 신나게 일할 공무원은 없다. 책임은 있는 사람한테만 ‘적확(的確)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