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돈세탁과의 전쟁'…금융개혁 시동

유령회사 '검은돈' 원천 봉쇄

기업·법인 실소유주 신고 의무화
정부가 계좌 투명하게 관리 감독

은행비밀법 기반 재산은닉 악용
최근 러 금융제재 '구멍' 비판 커
스위스가 ‘돈세탁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자국에 등록된 기업의 소유 구조를 명확히 해 ‘자금 은닉처’로서의 오랜 오명을 벗겠다는 취지다. 스위스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서방국들의 제재를 피해 러시아 엘리트들이 불법 자금을 유통하는 통로로 활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기업·신탁 실소유주 신고 의무화

30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카린 켈러서터 스위스 재무장관은 이날 이런 내용을 골자로 하는 금융 개혁 조치를 발표했다. 켈러서터 장관은 “돈세탁은 경제를 해치고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위태롭게 한다”며 “금융 범죄로부터의 강력한 보호 시스템은 금융 중심지로서 명성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데 필수적”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개혁 조치에 따르면 앞으로 스위스에 등록된 기업, 신탁 등 법인은 스위스 정부에 실소유주를 신고해야 한다. 실소유주의 이름이 기재된 연방관보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으며, 법무부와 연방 경찰이 관리한다. 재무부는 관보를 정기적으로 점검한 뒤 필요시 제재할 계획이다. 스위스 정부는 이를 통해 “(시중 자금의) 투명성이 높아질 것”이라며 “검찰당국이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법인의 지배구조를 규명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신탁 또는 지주회사를 세웠거나 부동산 거래를 알선한 변호사, 회계사, 컨설턴트도 기업 실사 규정을 준수하고 신고할 의무를 지게 된다. 다이아몬드, 금 등 귀금속 거래 과정에서의 현금 결제 한도는 10만프랑(약 1억5000만원)에서 1만5000프랑(약 2259만원)으로 대폭 낮췄다.스위스는 ‘페이퍼컴퍼니’(유령 회사)를 통한 돈세탁이 빈번하게 이뤄져온 국가다. 기원은 1934년 도입된 ‘은행비밀법’이다. 이 법은 스위스 은행에 10만프랑 이상을 예치한 사람에게는 신원 확인을 요구하지 않고 계좌 개설, 입출금이 가능하게 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조치다. 그 결과 전체 인구가 870만 명에 불과한 이 나라에 2조4000억달러(약 3175조원) 규모의 역외 자산이 몰려들었다. 전 세계의 신흥 재벌과 범죄자들이 이런 시스템의 허점을 악용해 재산 은닉과 돈세탁 등에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스위스 정부의 이번 조치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돈세탁을 원천 차단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美 “더 많은 조치 취해야”

최근 들어서는 미국 등을 중심으로 대러시아 제재 위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비난이 거세졌다. 러시아에 재정적 압박을 가하는 과정에 스위스가 너무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스위스는 주요 7개국(G7)이 러시아 엘리트들의 재산을 추적·동결하기 위해 조직한 기구인 ‘러시아 엘리트·대리인·올리가르히 태스크포스(REPO)’에도 참여하고 있지 않다. 스위스 주재 G7 대사들은 지난 4월 공동성명을 내 “스위스 법에는 구멍이 많다”며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블룸버그에 “스위스가 더 많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올리가르히와 다른 대리인들을 통해 돈을 융통할 가능성 자체를 궁극적으로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부패 감시 단체 국제투명성기구(TI) 역시 “(실소유주가 등록된) 연방관보를 언론과 비정부기구(NGO)에 공개해야 한다”며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스위스 정부는 이번 개혁을 통해 은행과 기업에 고객의 대러시아 제재 위반 여부 등을 철저히 조사·통제할 의무를 강화할 방침이다. 이번 개혁안은 정부가 마련한 초안으로 앞으로 3개월간 정당·주정부·시민단체와의 협의를 거친 뒤 내년 의회에 정식으로 상정될 전망이다. 비판론자들은 협의 과정에서 규제 수준이 약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