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여 감독 "8년 전 꺾은 스페인 女축구 우승…협회가 나서야"

"여자축구 발전 안건은 다 나왔다…실제 환경 바뀌는지 봐야"
최근 유럽 팀 발전상 지목…"거긴 남자팀 노하우로 여자팀 운영"
"중요한 게 뭐냐면요. 협회의 의지예요, 의지. 여자축구를 키우겠다는 게 정몽규 회장의 취임 일성 아니었나요?"
여자 실업축구 WK리그 세종스포츠토토의 윤덕여 감독은 2년 7개월여 전 정몽규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취임사를 기억한다.

3선에 성공한 정 회장은 2021년 1월 27일 낸 취임사에서 가장 먼저 여자축구를 키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당시 정 회장은 "여자축구는 최근 국제축구연맹(FIFA)을 비롯한 전 세계 축구계의 화두"라며 "여성의 축구 참여 확대가 축구 산업 다변화와 등록인구 증가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고 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세종 시내 구단 숙소에서 연합뉴스와 만난 윤 감독은 "현장에서는 실제로 큰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2012년부터 8년간 협회 소속으로 여자 대표팀을 이끈 터라 윤 감독도 실무진이 애쓰고 있는 사실은 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회장의 포부와 달리 윤 감독의 눈에 협회가 조직의 '전력'을 쏟는 것 같지는 않다.

윤 감독은 "협회에도 여자축구 담당 부서가 있긴 한데, 할 거면 제대로 추진해야 한다.

그 안에서 한, 두 사람이 열심히 애쓴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이어 "월드컵 등 큰 대회가 끝나면 협회에서 늘 콘퍼런스를 열어 지도자, 각계 전문가를 모셔다가 많은 이야기를 했다"며 "그 많은 이야기 중 지금 시행된 게 얼마나 있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지가 있다고 말은 하는데, 표출되는 게 중요하다"며 "세미나만 하면 뭐하나.

좋은 안건은 이미 나와 있다.

그게 조금씩 반영되면서 환경이 개선되는지를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감독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2023 FIFA 여자 월드컵과 관련이 있다.

지난달 20일 막을 내린 대회의 우승팀은 스페인이었다.

사상 첫 우승의 감격을 누린 스페인은 4년 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16강이 마지막 무대였다.

2015년 캐나다 대회에는 조별리그에서 떨어졌다.

그때 스페인을 떨어뜨린 팀이 윤 감독이 이끈 한국 대표팀이었다.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윤덕여호 2-1로 진 스페인은 조 최하위로 짐을 쌌고, 한국은 최초로 16강 무대를 밟았다.

8년 후 스페인의 우승을 지켜본 윤 감독은 착잡한 심정이다.

윤 감독은 "그때 스페인이 유럽에서 대단한 팀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대회가 끝나고 스페인을 포함해 유럽의 성장세가 가팔라졌다"며 "2019년 월드컵 때 경험해보니 이전과는 모든 게 달라졌다"고 돌아봤다.

윤덕여호는 2019년에는 프랑스, 나이지리아, 노르웨이에 연패하며 일찌감치 짐을 쌌다.

윤 감독은 "4년 사이 유럽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여러 곳에서 남자팀들의 노하우를 여자축구에 접목했다"며 "우리는 남자 프로팀이 여자팀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 수원FC뿐"이라고 짚었다.

이어 "남자팀들도 어렵다고 하는 건 안다.

이런 상황이니 협회에서도 정책적인 청사진이나 대안을 제시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FC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 명문 남자팀이 함께 운영하는 여자팀이 최근 스페인 여자축구의 급성장을 주도해왔다.

특히 바르셀로나는 2020-2021·2022-2023시즌 유럽축구연맹 여자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는 등 몇 년간 명실상부한 최강으로 거듭났다.

3시즌 정규리그 성적이 91승 1무 2패다.

바르셀로나의 흥기는 대표팀 전력 강화로 이어졌다.

골든볼·영플레이어상 수상자 아이타나 본마티·살마 파라유엘로를 비롯해 이번 월드컵에 나선 23인 중 9명이 이 팀 소속이었다.

앞서 지휘관으로 두 차례 월드컵에 참여한 윤 감독은 이번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표팀 제자들이 분투하는 호주의 현장을 찾았다.

콜롬비아, 모로코와 조별리그 H조 1, 2차전을 관전한 윤 감독은 점점 성장하는 여자축구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윤 감독은 "32팀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경기 수도 늘었는데도 평균 관중이 3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전 세계에서 관심, 열정을 보여준 것"이라며 "이번에 여자 선수들도 100%는 아니지만 남자 선수들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걸 보고 팬들도 흥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중석에 가니 객관적 시선으로 대표팀을 볼 수 있었다"며 "벤치에서 마음 졸이며 그라운드를 보는 것과 다르더라. 선수들 움직임 하나하나가 잘 보이고, 어떤 마음인지도 더 잘 느껴졌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윤 감독은 자신의 후임으로 대표팀을 지휘하는 콜린 벨 감독이 WK리그에 대한 거센 비판을 쏟은 '문제의 기자회견'에 대해서는 아쉬움도 표했다.

벨 감독은 모로코와 H조 2차전 직후 WK리그의 낮은 경쟁력을 꼬집으며 한국 여자축구 구조의 '전면 개혁'을 주창했다.

윤 감독은 2연패에 따라 16강행 희망이 희미해진 상황에서 수장이 책임감을 더 보였으면 바랐다고 한다.

윤 감독은 "구조적인 문제는 나중에 또 언급할 자리가 있었을 것"이라며 "감독은 결과로 말한다.

패배에 대한 미안함을 가장 먼저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또 선수를 먼저 보호해야 하는데 이게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계 모든 지도자의 덕목이라 본다"며 "시스템 관련해서는 2번의 월드컵을 치르며 내가 더 벽에 많이 부딪혔다"고 돌아봤다.

다만 윤 감독은 벨 감독의 지론처럼 우리나라도 그라운드에서는 '한 차원 높은 축구'를 선보일 때가 됐다고 진단했다.

윤 감독은 "이제 축구 자체가 예측하고, 실수를 줄이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됐다"며 "전방에서 공을 빼앗겨도, 정확한 예측력으로 상대가 5m를 전진하기 전에 먼저 눌러버리면 후방의 선수들이 덜 뛰어도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 움직임을 따라잡는 순간적 폭발력과 판단력도 중요하다.

그게 승패를 좌우하게 된다"며 "어떻게 선수들이 그런 능력을 지니게 할지 지도자가 깊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 감독은 최근 정립 중인 자신의 축구 철학이 체력적 부하 속 운동능력을 손실 없이 발휘해야 한다는 벨 감독의 '고강도' 슬로건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고 했다.

이어 벨 감독의 고강도론에 대한 지지처럼 비치는 건 원치 않는다면서도 윤 감독은 한국과 강호들의 '경기 강도 차이'는 인정해야 할 현실이라고 짚었다.

윤 감독은 "피지컬 코치를 통해 미국 대표팀의 데이터를 봤다.

활동량만 보면 비슷했지만 고강도 상황에서 속도 변화 차이가 확연했다"며 "이게 공수 전환·크로스 타이밍·반응 속도 등에 영향을 준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도 전 세계 여자축구계의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며 "계속 경쟁한다는 생각으로 상위 팀들에 조금씩이라도 가까이 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덧붙였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