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C '빅토리아 시대 문화의 결정체' 레이턴의 예술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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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새미의 공예의 탄생런던 서부 켄싱턴 지역 소박한 외관 붉은 벽돌의 저택이 있다. 주변의 다른 집들과 비교해 보아 딱히 다른 점을 찾기 어려운 집이다. 그러나 이 집에 들어서면 외관과 다른 실내에 깜짝 놀라게 된다. 이 집은 빅토리아 시대 예술가 프레데릭 레이턴 경(Frederic, Lord Leighton, 1830-1896)의 스튜디오와 집을 겸한 주택이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어딘가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다. 아랍 홀 (Arab Hall)이라는 이름의 이 입구 공간은 건축가 조지 애치슨(George Aitchison, 1825-1910)과 도예가 윌리엄 드 모건(William De Morgan, 1839-1917)이 협업으로 완성한 공간으로 창은 아랍 건축에서 보이는 격자 모양 패턴 패널 마슈라비야 (Mashrabiya)로, 벽은 이즈니크 (İznik), 다마스쿠스 (Dimashq ash-Sham)에서 생산된 것으로 알려진 세라믹 타일로, 바닥은 대형 페르시아 카펫으로 장식되어 있다.홀의 중앙에는 얕은 분수가 있는데, 벽 뒷면에서 공작새 두세 마리는 족히 걸어 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당혹스러워진다. 동시대 화가 제임스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와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Jones, 1833-1898)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이 작은 실내 분수에 들어간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상상 속의 공작새를 피하다 분수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천장을 바라보면 온통 금빛이다. 금박으로 장식한 돔 형태의 천장과 아랍 장식의 벽면! 도대체 여기는 어디이며 지금은 언제인가?레이턴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유명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1860-70년대 영국 미술계는 아카데미 풍의 보수적인 작품이 지배적이었다. 레이턴 경은 역사화 및 신고전주의 양식 그림으로 20대에 이미 명성을 떨쳤고, 1878년, 40대 후반에 왕립예술원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레이턴은 1865년부터 사망하는 1896년까지 이 집에 공을 들였다.
31년이라니! 레이턴은 1869~70년에 집의 동쪽 벽을 허물고 스튜디오로 사용할 작업 공간을 증축했고, 그 유명한 아랍 홀은 1877년부터 1881년까지 4년 동안 공사했다. 레이튼이 왕립 예술원의 회장이 된 해가 1878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랍 홀 완공 시기가 레이턴의 전성기였을 테다. 이 집은 선언과도 같았다. 왕립예술원 회장으로서 미학적 견해도 대내외에 보여줘야 했고, 빅토리아 시대의 젠틀맨, 수집가, 예술가 및 전문가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무대로도 기능해야 했다.그는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족을 위한 공간 대신 작은 침실 하나와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다이닝 공간, 그리고 작품을 전시, 감상하기 위한 공간을 계획했다. 그가 소장했던 작품은 존 컨스터블의 풍경화, 들라크루아 및 코로의 작품을 포함해 수백 점에 달했다. 또한 라파엘 전파 화가인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미국 초상화가 존 싱어 사전트(Singer Sargen, 1856-1925) 및 로런스 알마타데마(Lawrence Alma-Tadema, 1836-1912)와 같은 친구들의 작품으로도 벽을 채웠다.
당시 레이턴은 미술시장의 호황기와 더불어 높은 작품가를 구가하는 작가였다. 레이턴 작품 컬렉터 중에는 빅토리아 여왕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왕은 레이턴의 첫 아카데미 전시에 출품작 <Cimabue's Celebrated Madonna>(1853–1855)를 1855년 소장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69년에, 소설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 1819-1880),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 1812-1889)도 레이턴 하우스를 방문했었다. 이 집은 그야말로 빅토리아 영국 사교의 정점에 있었다.레이턴은 부유한 집안 배경 덕분에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10대 후반에 가족과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했으며, 피렌체와 로마를 포함한 유럽의 도시를 여행했다. 20대 후반까지는 로마, 파리에서 살았고, 북아프리카로 여행했다. 그는 30대에 런던에 정착하면서부터는 매년 여름 긴 여행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스페인, 스위스, 그리스, 아일랜드, 레바논, 모로코, 알제리, 이집트, 시리아 및 터키 등이 그의 목적지였다.레이턴은 1867년 그리스와 튀르키예를 여행하면서 타일을 컬렉션하기 시작해 이후에도 지속해서 아라비아 및 페르시아 공예품을 수집했다. 심지어 《천일야화》를 번역한 것으로 유명한 탐험가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경(Sir. Richard Burton, 1821-1890)에게 타일과 카펫을 대신 구입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레이턴의 이런 열정적인 동양 예술품 사랑은 아랍 홀이라는 자택 공간 구성에서 정점에 달했다. 아랍 홀 건축 공사에는 도예가 드 모건, 디자이너 월터 크레인(Walter Crane, 1845-1915), 조각가 에드가 보엠(Edgar Boehm, 1834-1890), 일러스트레이터 랜돌프 칼데콧(Randolph Caldecott, 1846-1886)이 참여했다. 소위 종합 예술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대규모 공사였다.레이턴 경을 포함한 빅토리아 시대의 수집가들은 자신들이 수집한 앤티크 타일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했다. 1920년대가 되어서야 레이턴이 수집했던 타일이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주요 지방 수도였던 다마스쿠스와 이즈니크에서 제작된 타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즈니크는 16세기경 오스만 술탄의 이스탄불 궁정 장식을 위해 세라믹 제작이 활성화되면서 부상했던 소도시였다.
오스만 제국이 새로운 모스크, 공공건물, 목욕탕 등을 대규모로 축조하기 시작하면서, 시리아 전역에서 숙련된 타일 공예가를 소집해 타일을 대량으로 생산했고, 이즈니크는 세라믹 타일의 주요 생산지 중 하나였다. 레이턴이 수집했던 타일이 바로 그 16세기 타일이었는데, 앤티크 타일로만 레이턴 하우스를 장식하기에는 타일이 부족했다. 레이턴은 아랍 홀의 분위기에 어울리도록 타일을 디자인, 재제작할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가 필요했다. 드 모건의 과업 범위는 깨진 앤티크 타일을 교체할 수 있는 타일 제작, 나르시소스 홀 (Narcissus Hall)에 청록색 타일을 추가로 제작해 벽면을 장식하는 것이었다.드 모건은 1860년대 모리스 社 (Morris & Co.)와 협업을 진행하는 등 미술공예운동을 이끌었던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의 동료이기도 했고, 노동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해 중세로 회귀하고자 했던 미술공예운동의 예술적 이상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수작업을 선호했고, 아름답고 기능적인 사물을 만들어 사람들의 생활환경 및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드 모건은 1872년 첼시 인근 도자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상상력이 풍부한 도예가였다. 타일 위에 식물, 생기 넘치는 동물과 새, 신화 속 생물과 기하학적 모티프를 조화롭고 대담하게 구현했다. 또한 그는 도자 제조의 기술적 측면도 적극적으로 실험했다. 1873~1874년에는 히스파노-모레스크 도자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주석 유약 토기인 마요르카 (Majorca)에서 발견한 광택 도자 기술을 재발견했고, 1875년부터는 진한 파란색, 청록색, 망간 보라색, 녹색, 인도 빨간색, 레몬색 등 “페르시아”로 이름 붙인 색 조합을 본격적으로 작업에 적용했다.드 모건의 타일은 표면의 화려한 그림 장식에도, 사실은 위생과 공중 보건에 대한 우려가 커지던 시기에 크게 유행했다. 콜레라가 발병하고, 영아 사망률이 최고를 이르던 때, 타일은 공간을 위생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내구성이 뛰어난 소재였다. 1860년대에는 민튼 社 (Minton)와 같은 주요 도자 제조업체가 타일을 산업 규모로 생산하기도 했다.
드 모건에게도 갈등은 있었다. 그는 산업 공정 자체에 반대했지만 처음에는 네덜란드에서 산업적으로 생산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준비된 타일을 구입해서 사용했다. 이후에는 웨지우드 등 영국산 블랭크 타일을 구입했고, 이후에는 블랭크 타일을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드 모건은 산업적으로 대량 생산된 블랭크 타일도 계속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산업 타일의 광택을 선호하는 그리고 규격 타일을 선호하는 고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다시 레이턴 하우스로 돌아와 보자. 레이턴은 여름마다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이 웅장한 집은 비어 있었다. 너그럽게도 레이튼은 자신이 집을 비웠을 때 대중에게 이 집을 개방했다.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미술공예 양식의 커튼, 이즈니크 타일 및 드 모건의 타일로 장식된 아랍 홀이 더 나은 취향을 위한 대중 교육을 위해 유용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레이턴 하우스는 중동 장식미술 뿐 아니라 미술공예운동 양식의 커튼에 바로크 양식의 가구, 일본 공예품까지 혼합된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었다. 건축주 레이턴의 의도는 학술적으로 명확한, 특정 출처의 장식미술을 구현하는 것보다는 시각적인 웅장함 구현에 맞춰져 있었기에 이런 혼란이 야기되었다. 에드워드 번-존스는 "동쪽의 모든 멋진 것들을 그렇게 어리석은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며 레이턴의 취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레이턴이 사망했을 때, 그의 여동생들은 유언장에 명시된 유산을 수령하기 위해 소장품을 경매로 처분했다. 또한 그렇게 큰 인기를 구가했던 그의 작품은 안타깝게도 20세기에 들어서자 빠른 속도로 잊혔다. 그렇지만 21세기 들어 레이턴 하우스는 19세기 중반 영국 사회의 예술적, 사회적 현상을 조망하는 창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공공의 비용을 들여 2022년 복원 사업을 완료했다. 사진으로 남아 있던 레이턴 생전 집의 모습에 근거해 경매 처분되었던 작품은 대부분 장기 임대 형식으로 제 자리에 돌아왔고, 전기 등 기능적인 부분도 해결했다.
레이턴 하우스는 빅토리아 시대 문화의 결정체였다. 레이턴 개인의 취향, 태도, 시선을 저장하는 장소였으며, 시대의 취향이나 실내 장식 문화, 오리엔탈리즘, 수집 열기, 박물관의 성장, 미학적 담론 등 나아가 오늘날 우리의 취향, 태도, 시선과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하게 만들어 주는 통로가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물과 함께 살고 있는가 하는.
* "비혼주의라더니"…'29세 연하女와 동거'에 쏟아진 비난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세요.
https://tv.arte.co.kr/art/theme/17
**참고자료
Fiona McKenzie Johnston, Decorating lessons from Leighton House, one of London’s greatest interiors, House & Garden 7 October 2022, from: https://www.houseandgarden.co.uk/article/leighton-house
William De Morgan’s Tiles, Victoria and Albert Museum, https://www.vam.ac.uk/articles/william-de-morgans-tiles#slideshow=380815788&slide=0
Kathryn Hughes, Leighton House: a private palace of art, The Guardian, Sat. 17 April. 2010,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0/apr/17/frederic-lord-leighton-house-resto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