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잠'…일상 속 공포라 더 무섭다



체호프 연극같은 장막극 스타일
이선균·정유미의 호흡 돋보여
연극 무대에 익숙하다면 정유미·이선균 주연의 영화 ‘잠’을 보면서 ‘갈매기’ ‘세 자매’ 등 러시아 대문호 안톤 체호프가 쓴 장막극(長幕劇)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영화는 연극의 막(幕)과 비슷한 개념의 장(場)으로 나뉜다. 체호프의 장막극은 똑같은 일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되 막과 막 사이에 달라진 극적 상황을 보여주는데, ‘잠’도 비슷한 전개를 장을 통해 표현한다. 영화의 핵심 무대는 연극처럼 신혼부부인 ‘수진’(정유미)과 ‘현수’(이선균)가 살고 있는 아파트 한 곳이다.다만 체호프의 장막극이 대부분 네 개의 막으로 구성된 반면 영화 ‘잠’은 세 개의 장으로 끝난다. ‘잠’을 연출하고, 시나리오도 쓴 유재선 감독은 “수진과 현수의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시기를 3장으로 나눴다”며 “각 장 사이마다 벌어진 일을 추측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잠’은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고 계속 살아가는 희망을 발견한다’는 주제의식에선 체호프의 장막극과 일맥상통하는 점도 있지만, 구체적인 극적 세계와 재미는 전혀 다르다. 미스터리 공포물에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한 장르 영화다. ‘잠’이 장편영화 데뷔작인 유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준비하고 촬영하는 과정 내내 제1의 철칙은 재밌는 장르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제1장 초반, 잠이 덜 깬 남편 현수가 중얼거린 혼잣말과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몽유병 같은 수면 중 이상행동은 행복한 신혼부부의 일상을 180도 바꿔 놓는다. 1장에서 극중 공포의 근원이 이상행동 강도가 점점 높아지는 현수라면 2장과 3장에선 거실 벽에 붙어 있는 ‘둘이 함께하면 극복 못 할 일이 없다’는 가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수진으로 옮겨간다. 수진은 수면 전문 병원의 치료와 처방이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어머니(이경진)의 무속신앙적 해석에 경도되고, 3장의 파국을 이끌어낸다.2장에 어머니가 데려온 무속인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는 수진의 눈빛에서 어느 정도 예상된 결말은 호불호가 가장 크게 갈릴 대목이다. 소재와 연출의 참신성에 비해 샤머니즘에 기댄 결론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등장인물이 이끌고 가는 영화란 점에서 ‘배우의 예술’인 연극과 닮았다. 부부로 나오는 정유미와 이선균은 베테랑 배우답게 멋진 호흡을 보여주며 각자의 배역을 개성 있게 소화한다. 특히 정유미는 장마다 캐릭터 변화가 심한 수진을 변화무쌍한 표정과 내면 연기로 실감나게 표현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