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종차별 이겨낸 한인들의 투쟁…다큐 '프리 철수 리'

누명 쓰고 감옥 갔다가 풀려난 이철수 생애 담아
하줄리 감독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이철수 생각해볼 기회 되길"
6·25 전쟁 때 한국에서 태어난 이철수(1952∼2014)는 미국인과 결혼한 어머니를 따라 열두 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미국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을 떠돌던 그는 1973년 6월 이곳에서 발생한 중국인 갱단 두목 총격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사건 현장에도 없었지만, 아시아계의 외모를 잘 구별하지 못하는 백인 목격자의 증언이 결정적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인종적 편견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재소자들 사이에 폭력이 난무하기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주의 한 교도소에 수감된 그에게 한 줄기 빛이 찾아든 건 신문사 '새크라멘토 유니언'의 한인 기자인 이경원이 그의 사연을 취재하면서다.

1978년 이경원 기자의 심층 보도로 이철수가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한인 사회가 재심을 요구하는 구명 운동에 나섰다.

'프리 철수 리'(Free Cholsoo Lee·이철수에게 자유를) 운동의 시작이었다. 구명 운동은 아시아계 커뮤니티로 번졌고, 1982년 9월 이철수는 무죄 평결을 받아 이듬해 석방됐다.

이철수 사건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드러낸 동시에 사법부의 철옹성 같은 벽을 넘어선 풀뿌리 운동의 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음 달 개봉하는 '프리 철수 리'는 이철수 사건의 전말과 그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영화는 이철수의 언론 인터뷰, 그의 친구로 구명 운동을 이끌었던 일본계 미국인 변호사 야마다 란코를 비롯한 주변 인물의 인터뷰,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이철수의 모습을 담은 영상과 사진 등을 재구성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영상 자료가 없는 이철수의 교도소 생활은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했다.

이철수는 교도소에서 재소자의 공격을 방어하려다가 그를 살해하면서 사형 선고까지 받는다.

사형장에서 삶을 마감할 뻔했던 그는 이경원 기자의 폭로 기사로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 아시아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아시아계가 그의 구명 운동에 결집한 건 켜켜이 쌓인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결과였다.
이철수가 무죄 평결을 받은 날의 영상은 환호하는 아시아계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인들은 묵은 한을 푼 듯 "우리가 이겼다"고 외치고, 눈물을 흘리며 애국가를 부른다.

교도소 밖으로 나온 이철수는 구명 운동을 이끈 이들과 기쁨의 포옹을 한다.

유명 인사가 된 그는 미국 곳곳을 돌면서 강연하고, 잘생긴 외모 덕에 연예인 같은 대접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영광은 오래 가지 못한다.

건물 청소 같은 일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약에 손을 댄다.

마약 범죄로 다시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나오고, 갱단에 엮여 활동하다가 화재 현장에서 온몸에 화상을 당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영광의 정점에 오른 이철수뿐 아니라 다시 나락에 떨어진 이철수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조명한다.

만년의 그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모습은 그의 불운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이철수 사건의 진정한 영웅이 이철수가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내며 손을 맞잡고 행동에 나선 아시아계 미국인들이란 걸 알게 된다.

이철수는 촉매 역할을 한 것이고, 그의 굴곡진 삶은 깊은 울림을 끌어낸다.

이철수의 일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영화의 내레이션은 한국계 미국인 세바스찬 윤이 맡았다.

교도소 경험이 있는 그는 이철수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토대로 관객과 소통해나간다.

'프리 철수 리'를 공동 연출한 하줄리(미국명 줄리 하) 감독과 이성민(유진 이) 감독은 둘 다 한국계 저널리스트다.

이철수가 세상을 떠난 2014년 하 감독이 그의 장례식장을 취재하러 갔다가 이경원 기자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하 감독은 4일 시사회에서 "모든 사회엔 각기 다른 버전의 이철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라며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이철수가 누구인가 생각해볼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이철수의 삶에는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떠난 한국인들의 고통도 응축돼 있다.

영화 제작에 참여한 김수현 프로듀서는 "(1970∼1980년대) 재미 교포들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한국 관객들이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10월 18일 개봉. 86분. 12세 관람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