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준호의 딜 막전막후] 산은, HMM 유찰 카드도 활용해야

차준호 증권부 기자
▶마켓인사이트 9월 5일 오후 2시 29분

“한진해운 파산 결정이 아직도 꿈에 나옵니다. 단 1원도 허투루 써선 안 된다는 소명의식이 있습니다.”(HMM 고위 관계자)올해 초 HMM과 HMM의 대주주인 산업은행 본사엔 사모펀드(PEF)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PEF들이 보유하고 있었던 해운사 경영권을 팔기 위해 HMM 측을 찾아간 것이다. HMM 내부엔 12조원에 달하는 현금이 두둑이 쌓여 있었다. 해운업계에선 ‘HMM이 인수합병(M&A)을 외면한 결과 국내 선사들이 대거 해외로 넘어가고 있다’는 여론도 퍼졌다. 정치권과 전직 관료들이 나서서 HMM 측에 “그동안 모아둔 실탄으로 국내 해운사에 투자하라”고 권유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HMM과 산업은행의 경영진은 신중했다. 흥망성쇠를 거듭해온 해운업 역사를 돌아보면 단기 성과에 일희일비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다. HMM은 2021년 7조3775억원, 지난해 9조9515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2년 연속 사상 최대 규모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으로 시계를 돌리면 2010년부터 2019년까지 9년간 3조8401억원의 누적 적자를 기록했다. HMM의 보수적인 경영방침은 해운업황이 다시 장기 불황으로 돌아설 때를 미리 대비한 것이다.

매각 성공 가능성엔 반신반의

HMM의 매각이 닻을 올렸다. 2016년 정부 주도의 해운업 구조조정이 시작된 후 약 7년 만에 열매를 거둘 시기가 온 것이다. HMM은 수년간 투입된 막대한 공적자금과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호황 등으로 당초 기대보다 빠른 속도로 정상화됐다. 이제 공적자금 회수를 극대화하면서도 국적 선사를 장기적으로 경영할 인수 후보자를 찾는 과제가 남았다.

매각 측은 최근 예비입찰을 통해 인수 후보를 LX, 하림, 동원 등 세 곳으로 추렸다. 세 곳 모두 해운업과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는 대기업들이다. 산업은행 경영진은 연내 매각을 자신하지만, 시장은 성공 가능성을 반신반의한다.

투자은행(IB)업계는 “인수 후보 기업들이 막대한 인수자금을 제대로 끌어올 수 있겠냐”는 의문을 품고 있다. 업계는 LX그룹이 내부에서 동원할 실탄을 2조원 안팎으로 추산한다.

HMM 보유 '12조 현금'이 변수

하림은 1조5000억원, 동원은 6000억원 수준이다. 이들 기업이 핵심 자산을 팔지 않고 인수자금을 마련하려면 대규모의 빚을 져야 한다. 예비입찰 당시 써낸 5조~6조원대 희망 가격이 본입찰까지 이어진다고 하면 세 곳 모두 3조~5조원의 인수금융을 끌어와야 한다. 현재 금리 수준을 고려하면 이자로만 매년 수천억원을 물게 되는 것이다.

인수자 측이 이런 대출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HMM에 쌓인 12조원의 현금을 활용하려 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HMM 인수를 위해 세운 특수목적법인(SPC)을 HMM과 합병해 빚을 HMM으로 이전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산업은행 측은 M&A 이후에도 2대 주주로 남아 최대주주를 견제하겠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방안이다.

M&A의 성사 여부는 오는 11월 본입찰에서 인수 후보들이 제안할 가격과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 공적자금의 회수 극대화와 인수 절차의 투명성뿐 아니라 HMM의 장기 성장 가능성까지 면밀히 검토한 뒤 적합한 인수 후보자를 찾아야 한다. 이런 고차방정식을 풀려면 인수 후보자들의 제안과 시장 여건에 따라 매각 측이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하지만 벌써부터 시장에선 산업은행 경영진이 임기 내 성과를 내기 위해 매각을 서두른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유찰 가능성까지 열어둬야 인수 후보자들은 더 좋은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실무진이 이런 유찰 결정을 자신 있게 내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해운업 구조조정의 마지막 실타래가 풀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