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누이에게 필요한 건 단 두 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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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구은서의 이유 있는 고전"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부탁한 것은 여성과 픽션에 대해 강연해달라는 것이지 않았나요? 이게 자기만의 방이라는 문제와 무슨 관련이 있나요? 이제 내가 해명할 차례군요."
버지니아 울프의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치 자신의 책이 '여성과 글쓰기에 대한 문제작'으로 자리매김할 걸 예견한 것처럼요. 페미니즘에 대한 무수한 의심과 공격을 익히 안다는 듯이 말이죠.이 책은 울프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강연했던 원고를 기초로 약 1년 뒤 1929년에 출간된 논픽션입니다. 대화체 문장이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도발적이죠.울프는 이 책의 목적은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 한다면 돈과 자신만의 방을 가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것뿐"이라고 선언하듯 말합니다. 그래서, 돈과 방이 대체 여기서 왜 나오는 걸까요?
책 속 가상의 인물 '메리 시턴'의 이야기가 울프의 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거예요. 시턴은 울프의 분신, 또는 숙모(캐롤라인 에밀리아 스티븐)의 분신입니다. 울프는 '나'뿐 아니라 시턴을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주장을 여성 보편의 이야기로 확장시킵니다.시턴은 어느날 여성과 픽션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기 위해 대학 도서관으로 향합니다. 자료도 들춰보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관리원이 나타나 시턴에게 물러가라고 손짓을 해댑니다. "그 신사는 유감스럽지만 여자는 칼리지 연구 교수와 동행하거나 소개장이 있을 때만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습니다."
'막대한 재산을 모아 대학 도서관을 짓는 기금으로 내놓았다면 달랐을까?' 이런 꿈조차 꾸기 힘들어요. 왜냐하면 당시 법률상 여성이 자기 소유 재산을 가질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그 전까지 수 세기 동안 여성의 재산은 남편의 명의로 등록해야 했죠. 그러니 여성들은 돈을 벌고 불리는 교육에서 배제됐고요.
울프는 자신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 한쪽 성은 부유하고 한쪽 성은 가난한가? 가난은 픽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예술품의 창작에는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울프는 글 쓰려는 여성에게 필요한 건 공간적 독립(자기만의 방)과 재정적 독립(돈)이라고 주장합니다. 작가뿐일까요. 여성이 자신이 꿈꾸는 직업을 갖고 시간을 투자해 성공하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본 거죠. 자기만의 방이란 결국 여성이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뭔가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그 시간을 가족과 사회가 당연하게 존중해주는 걸 의미할 거예요.
그나마 현실 속 울프는 운이 좋은 편이었습니다. 울프는 1909년, 숙모로부터 유산 2500파운드를 가량의 돈을 받게 됩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책에 씁니다. 여성이 참정권을 얻었던 해(1918년) 즈음, 매년 500파운드씩 유산을 받게 됐다고요. "투표권과 돈 둘 중에서 내 손에 들어온 이 돈이 훨씬 더 중요하게 보였다고 고백해야겠지요." 유산 덕분에 신문사 기고, 노부인 책 읽어주기 같은 자질구레한 돈벌이에서 벗어나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됐죠.
울프 역시 자신이 매우 특수한 조건을 누리고 있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뜻이 맞는 사회사상가이자 작가인 남편 레너드 울프는 가족이자 동료였고요.그러나 그녀는 롤모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선례를 찾을 수 없다는 건 두렵고 외로운 일이죠. 울프는 책에 이렇게 적었어요.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18세기 이전의 여성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실이라고요. 그런 탓에 마음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참고할 만한 모델이 없습니다. (…) 그들이 어떻게 교육받았는지에 대해서 확실히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유명 여성 작가를 찾아보기 힘든 건 당연한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여성이 열등해서가 아니라요. "이러한 상황을 놓고 볼 때 여성 중 한 명이 갑자기 셰익스피어 희곡을 썼다면 그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지요."
울프는 셰익스피에에게 뛰어난 재능을 갖춘 주디스라는 누이가 있었다는 상상을 해봅니다. 주디스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을 테고, 문법과 논리학을 배울 기회도 얻을 수 없죠. 어쩌다 오빠의 책을 읽으면 부모님은 여자한테 쓸데없는 짓을 하지 말라고 타이릅니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약혼을 하고, 못다 이룬 꿈을 지닌 채 어느 한겨울밤 스스로 목숨을 끊을 거라고요.
그녀는 "16세기에 위대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여자들은 분명 누구나 미치거나 자기 자신에게 총을 쏘거나 마을 변두리의 한 오두막에서 반은 마녀로, 반은 마법사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조롱하는 존재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선구자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일까요. 그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세계 2차대전 발발 후, 마음이 예민하고 몸이 허약했던 울프는 코트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워넣고 영국 우즈 강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좌파 운동가였던 그녀는 일찌감치 게슈타포(독일 비밀경찰) '요주의 인물'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죠.
울프는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셰익스피어 누이 같은 사례가 다시 생겨도 시인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책을 맺습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울프를 비롯해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해온 작가들이 있었지요.
최근 국내 출간된 <문학의 역사>에서 울프는 당당하게 한 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서양문학사의 주요 흐름과 작가를 요약, 정리한 책입니다. 그녀의 생애와 문학작품을 소개한 목차의 제목은 '그녀만의 문학'. 이 책이 하나의 장을 할애해 소개된 또 다른 작가로는 셰익스피어가 있습니다.참고 자료
-존 서덜랜드 지음, 강경이 옮김, <문학의 역사>, 소소의책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