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쩍 내 진심이 지겹다. 그러면 쓰기가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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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은아의 탐나는 책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
엘렌 식수/신해경 옮김/밤의책/편집: 장미향
1.
가끔 이 노래를 몇 번씩 듣는다. 걸 프롬 이파네마(The Girl from Ipanema). 내가 뭘 마음대로 생각해버리든 말든, 여기 나오는 젊고 사랑스러운 이파네마 소녀는 관심이 없다.그 애는 그저 걸어간다. 눈길을 주지 않는다.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든, 그가 슬퍼하든 기뻐하든, 다른 사람이 듣든지 말든지. 끝까지 절대로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태양같이 매혹적이고 삼바처럼 감기는 상쾌한 자태로 바다를 향해 걸어갈 뿐인 소녀, 염문의 여지를 주지 않는 완벽한 타인. 나는 안심한다. 이 노래는 하도 많은 사람이 불러서 가수들의 배역도 각양각색이다. 일단 언감생심이 들어 슬퍼하는 남자가 있고, 그러는 남자를 보고 안타까워하거나 한심해하는 여자가 있다. 나는 원곡보다 He를 없애버리고 I가 된 여가수들의 노래를 좋아한다. 대부분은 소녀가 남자를 봐주지 않는 걸 흡족해하거나 고소해하는데, 듣다 보면 소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화자, 소녀를 보며 애를 태우는 화자, 소녀가 돼버리는 화자도 어쩌다 나온다.
어떤 노래든, 어떤 작품이든 이런 식으로 감상할 수가 있다.
물론 이런 감상과 엘렌 식수의 강의록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은 별 상관이 없다.
2.
그보다 식수는 이런 말들을 한다.“죽은 남성의 죽음은 우리에게 본질적이고 원시적인 경험을, 다른 세계로의 접근권을 주는데, 교훈이나 소란이 반드시 동반되지만 우리 고향의 상실을 동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세상의 끝을 줍니다. 인간이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끝을 경험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세계를, 한 세계를 잃을 필요가 있고, 세상에 한 세계보다 더 많은 세계가 있음을, 세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의 세계가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 짊어진 필멸과 불멸의 운명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죽음과 대면하지 않는 한에서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지워져버린 클리셰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비의 행위이지요.”(24)“우리는 매 관계를 곰곰이 따져 이해해야 합니다. (…) 우리 각자는, 개인적으로 또 자유롭게,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당신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 무엇인지 새로이 생각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28)
“왜 저, 엘렌 식수는 죽지 않고, 왜 그는 죽을까요? 둘 중 하나는 죽습니다. 당신이 죽는 쪽이라서 ‘나’는 죽지 않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개요입니다.”(67)
알제리 출신 유대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영문학자이자 소설가, 극작가, 에세이스트인 그는 1975년 『메두사의 웃음』 『출구』로 부재와 삭제에 저항하는 실천 전략으로서 여성적 글쓰기의 힘, “여성에 의한 말의 장악”이 지닌 마력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은 미국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던 식수가 1990년 UC어바인 비판이론연구소에서 한 세 차례의 글쓰기 강의(「망자의 학교」 「꿈의 학교」 「뿌리의 학교」)를 엮은 책인데, 자크 데리다는 이 강의에 붙여 식수를 “프랑스어로 글을 쓰는 작가 중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3.
요즘 나는 부쩍 내 진심이 지겹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쓰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 짧은 글도 마감 기한을 두 번이나 넘겼다. 식수를 “꼼짝달싹 못 하도록” 끌어당긴 것은 ‘진실’이라고 한다. 생각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 말하는 그는 진실을 언급하는 것이 죽음에 상당하는 행위라고 말한다.우리가 그 근처까지 간 “고백 성향”의 작가들을 “존경하고 동경”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로선 “탐험할 힘이나 수단이 없는 곳”, 우리 자신의 포기와 도주와 무능력·사랑과 비겁과 용기가 더 이상 변수가 되지 않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안에서 최악을 찾으려 애쓰고, 지우기의 과정이 없는 곳에서, 최악이 최악으로 남는 곳에서 털어놓기. (…) 최악 쓰기는 우리에게 우리보다 더 강할 것을 요구하는 행위입니다. 저의 작가들은 살해됐습니다.”(81) 글쓰기 사다리의 첫 칸, 「망자의 학교」는 이 죽음들을 불러냄으로써 진심을 의식하느라 그것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필요한 타자’가 되어준다. 그럼으로써 그를 행위자로 만들어준다.어떤 책은 무슨 얘기를 하든 글쓰기라는 행위에 관한 책이 되나 보다. “그런 책은 저자보다 강한 책”.(278) 이 묵시록적 예언은 『글쓰기 사다리의 세 칸』에서 저자가 언급한 그 어떤 책보다, 책이 될 운명이었을 이 강의록에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