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죄악이다" 외치던 소년, 세계를 누비는 '약한 건축'의 거장이 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절친이자, 10권 넘는 책을 쓴 '글쟁이'

나무와 돌과 바람의 건축가, 쿠마 켄고의 세계
“건축은 기본적으로 그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 함께 만들어야 비로소 건축이 그 장소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탄생한다. 그 대지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작품이 되는 것이다.”

쿠마 켄고가 그의 저서 <구마 겐고, 나의 모든 일>에서 한 말이다. 일본을 넘어 세계적 거장이 된 그는 끊임없이 묻는다. 약한 건축, 부드러운 건축, 지는 건축이 가능한가. 그래서 후학들에게 두 가지를 경계하라고 당부한다. ‘불후의 걸작을 남긴 예술가’, 그리고 ‘경이로운 건축 작품’.

대규모의 토목 공사와 스스로 브랜드가 돼버린 스타 건축가들이 결국 자기 복제로 괴물 덩어리를 만들어내는 건축을 그는 엄중하게 비판한다. 그의 건축물은 늘 자연과 어우러진다. 사람과 산다. 마치 그 대지에 태고적부터 존재해온 우주의 일부인 것처럼 말이다. “건축은 죄악이다”고 말하던 소년은 전 세계에 크고 작은 400여 개의 건축물들을 낳았다. 그의 주요 작품 중 10점을 골라 소개한다.

1. 스페인 발렌시아 치바 하우스 (2010)

발렌시아의 작은 마을 ‘치바’에 지은 단독 주택이다. 드넓은 오렌지 나무 농장으로 둘러싸인 두 개의 올리브 나무 밭 한가운데에 있다. 그 사이엔 전통 방식의 옹벽이 있었는데, 그는 지붕을 두 계단식 토지를 잇는 경사로로 설계했다.
지역의 토지법에 따라 집 표면의 절반 이상이 지하에 묻혀야 했다. 그런데도 모든 방은 바깥 풍경을 즐길 수 있도록 외부를 향해 개방됐다. 집의 대부분이 지하 있지만 마치 땅 위에 놓인 것 같다. 지붕은 올리브 나무들 사이에서 붓글씨 획처럼 올라가고 접히는 연속적인 나선형으로 지어졌다. 지중해 지역의 햇살을 막아주는 전통 방식의 파란색 커튼을 창문에 적용했다.

2. 이탈리아 치도리(CIDORI) (2010)

치도리는 직역하면 1000마리의 새다. 새가 입자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을 표현했다. 이탈리아에서 프로젝트로 진행한 이 공간은 개방적이고 투명한 ‘집’을 만드는 목적이었다. ‘치도리 코시’는 접착제나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에 홈을 내 얇은 직사각형 격자로 엮는 일본의 전통 건축 기술. 견고하게 만든 이런 구조물은 언제든 한번에 해체할 수 있다. 이 공간에서 나무는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3. 메무 메도우, 홋카이도 (2011년)

홋카이도의 경주마 농장을 지속가능성을 연구하는 훈련 및 연구 시설로 개조한 ‘메무 메도우’다. 초원에 지어진 실험 주택인 동시에 마구간과 실내 승마장을 대학 실험실과 훈련시설, 숙박시설로 바꾸는 프로젝트였다. 말이 살던 곳을 사람을 위한 집으로 바꾸는 일은 원래 있던 것들을 최소로 파괴하며 진행됐다. 30m 길이의 원형 트랙이 있는 실내 경기장의 일부는 레스토랑과 바로 변신했다.

4. 제주 롯데 아트빌라스-제주볼(2012)

쿠마 켄고는 제주를 방문한 뒤 현무암의 구멍들에 영감을 받았다. 부드럽고, 둥글며, 뚫린 모양을 건축에 옮기고 싶었다고. 집들을 어두운 둥근 돌로 디자인했다. 멀리서 보면 돌처럼 보이고, 가까이 가면 지붕이 된다. 검은 자갈 사이의 틈을 통해 빛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제주의 풍경 안에 또 하나의 제주를 솟아올린 세운 셈이다.


5. 스타벅스 오모테산도 (2011)

일본 도쿄의 스타벅스 오모테산도는 폭 7.5m, 깊이 약 40m의 길고 얇은 땅 위에 지어졌다. 작은 나무 조각들을 엮어 빛과 바람처럼 흐르는 유기적인 공간을 만들어 전 세계 스타벅스에서도 가장 독특한 장소로 탄생했다. 내부 공간을 덮고 있는 X자형 목재 뼈대는 길이 1.3~4m, 단면 6cm의 삼나무 약 2000개를 사용해 됐다. 전체 길이는 4km이다. 인근 다자이후라는 유적지에 현대 목조 건축 기술이 만나 다른 스타벅스와는 다른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 공간을 만든 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과도 친해졌다고.

6. 바르셀로나 까사바트요 계단과 복도 인테리어 (2020)

스페인의 보물급 건축물인 바르셀로나 카사 바트요. 가우디가 지중해 빛을 천재적으로 활용한 이 집에 쿠마 켄고는 자신의 찬사를 더한다. 내부 인테리어를 2020년 맡았는데, 알루미늄 체인 스크린을 사용해 (원래 8층 중앙 테라스에서 쏟아지던 자연광을) 지하의 석탄 저장고까지 다채롭게 끌어내렸다.

7. 호주 멜번-보태니컬 파빌리온( 2020)

호주 멜번의 한 식물원 나무에서 벌채된 목재를 사용한 파빌리온 프로젝트다. 이를 폐기하는 대신 나무 주위에 파빌리온을 지어 나무를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했다. 방문객들은 다양한 종류의 목재와 구조물 사이를 지나는 빛을 경험하게 된다. 나무들이 퍼즐처럼 맞물려 아치를 만들고, 다공성 나무껍질을 사용해 빛과 공기가 잘 스며들도록 했다. 나무로 지은 숲이랄까. 이 구조는 완전히 재활용할 수 있다. 다른 장소에서 분해와 조립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8. 나오시마 사나마네 사우나-사자에 (2022)

나오시마의 작은 만 근처에 있는 글램핑 시설 ‘사나 마네’의 중앙에 지은 유기농 목재 사우나 ‘사자에’다. 28mm 두께의 합판을 150겹씩 쌓아 만든 목재를 썼다. 평균 벽 두께는 단열과 보온을 잘 하기 위해 450mm로 설계됐다. 외관은 조개껍데기처럼 무수히 접혀 인상적인 그림자를 만든다. 내부에선 몸에 꼭 맞는 주름처럼 어디에 앉아도 편안하다. 빛도 자연스럽게 들어와 명상하게 한다.

9. 쿠수기바시-야마구치현(2022)

2018년 7월 서일본 홍수로 파괴된 이와쿠니시 슈토초 오소고에의 다리를 목조 다리로 재건했다. 다리 양쪽에는 독특한 사케 제조로 유명한 '닷사이'의 양조장과 판매점이 있는데, 이곳은 공사비의 목재 부분을 기부금으로 냈다. 반복되는 재난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편백나무 난간을 길게 결합했다. 주변 산맥과 어울리는 완만한 곡선을 만들었고, 그 옛날의 다리처럼 사람의 몸에 꼭 맞는 ‘휴먼스케일’로 제작됐다. 김보라 기자


10. 런던 밖 첫 V&A...스코틀랜드 던디 (2018) -이헌 칼럼니스트 특별기고

지난 달 광활한 스코틀랜드의 대자연에 몸을 맡겼다. 북부 여행을 마치고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남으로 남으로, 에든버러를 향하던 중이었다. 함께 여행하던 지인은 ‘던디’에 들르자고 했다. 던디? 스코틀랜드 동쪽 무역항, 산업혁명을 거치며 항해와 산업용 밧줄을 만드는 식물 ‘주트(jute)’ 생산지로 세계사에 잠시 한줄 기록을 남긴 곳. 이 별다른 매력도 없는 낯선 곳을 왜 굳이 가야 하나 의아해하던 차, 숨이 턱 막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낯설지만 어디서 본듯한 거대한 건물이 강변을 자리 잡고 있었다. 1852년 만들어진 빅토리아앤알버트(V&A) 뮤지엄이 런던 밖에 최초로 지은 미술관, V&A 던디였다.
그렇다! 던디는 이렇게 이 건축물 하나 만으로도 방문 가치가 충분한 곳이 되었다. 쇠락하는 산업으로 도시의 성장 동력이 떨어지자 시 정부는 2001년 당시 무려 10억 파운드(현재 환율로 1조 6700억원) 예산의 30년 장기 도시재생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그 일환으로 이 걸출한 건축물이 자리를 잡았다. 2018년 9월 문을 열자마자 이 건축물은 던디의 랜드마크가 됐다. 스코틀랜드의 첫 디자인 박물관이기도 하다.

쿠마 켄고는 2010년 이 건물의 디자인 공모전에 참여했다. 스코틀랜드 북해의 절벽 ‘눕 헤드(Noup Head)’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바다와 땅이 수천 수만 년의 시간 동안 때론 거칠고 때론 다정하게 대화를 주고 받으며 일군 절경을 던디 시내 중심부 테이 강변에 자연의 일부처럼 옮겨 놓았다.

견고하고 육중한 패널 수천 개가 만들어 내는 외관은 시선을 압도하지만 불편하지 않다. 자연을 닮은 모습 때문인지 이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입구 옆 안쪽으로 동굴처럼 강가로 향하는 길을 동심마저 자극한다. 높은 층고의 내부는 차양처럼 설치된 외장재 덕분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스코틀랜드의 하늘을 반영한다. 변덕스러운 날씨의 변화를 시간에 따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던디 최고의 경관 중 하나가 V&A 던디 이층의 카페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건축가의 눈에는 바다와 땅이 오래도록 나눈 대화를 이렇게 힘겹게 옮겨둘 가치가 충분했던 것 같다. V&A던디는 완공된 지 불과 5년 만에 시민들의 쉼과 놀이 공간이 됐다.마치 늘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던디=이헌 칼럼니스트

"건축은 죄악이다" 외치던 소년, 세계를 누비는 '약한 건축'의 거장이 되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절친이자, 10권 넘는 책을 쓴 '글쟁이' …그는 누구인가

1954년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났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작고, 낮고, 느린 ‘삼저주의’로 안도 다다오 이후 일본 건축의 한 축을 받치고 있다. 1979년 도쿄대와 대학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컬럼비아대 객원연구원을 거쳐 1990년에 쿠마켄코건축도시설계사무소를 설립했다. 지금까지 20여 개 국가에서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했다.

쿠마 켄고는 자신이 지치지 않는 비결로 꼽는 건 ‘삶의 세 바퀴’를 꼽는다. 삼륜차와 같은 안정된 주법으로 꾸준히 달릴 수 있었다고. 소설 집필에 있어 장편과 단편이 갖는 장점이 다르기에 두 가지를 병행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려 그는 “대규모 프로젝트와 소규모 파빌리온을 균형 있게 진행하는 게 건축가에겐 좋은 보완”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바퀴는 글쓰기다. 많은 자본과 이해관계가 개입되는 건축물에 비해 글쓰기는 순수한 것, 불순물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글쓰기는 잡음투성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출장가는 비행기에서 주로 글을 썼다. 그렇게 쓴 책만 <구마 겐고, 건축을 말하다> <나, 건축가 구마 겐고> <삼저주의> <작은 건축> <약한 건축> 등 10권을 넘는다. 대학원생 때부터 '그루포 스피치오' '세이고효'라는 필명으로 선배 건축가들을 마음껏 비판하는 글을 써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7년 ‘모리부타이 도요마마치 전통예능전승관’으로 일본건축학회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물/유리’로 미국건축가협회 듀퐁 베네딕투스상을 받았다. 2001년 ‘돌미술관’으로 국제석재건축상을 수상, 2002년 ‘히로시게미술관’을 비롯한 목재 건축으로 ‘스피릿오브네이처 국제목재건축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네즈미술관’으로 마이니치예술상을 수상했다. ‘산토리미술관’, ‘대나무집’, ‘아오레나가오카’, ‘브장송예술문화센터’, ‘국립경기장’, ‘무라카미 하루키 라이브러리’ 등이 있다. 일본을 넘어 유럽, 호주 등 전 세계에서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만 약 30건에 이른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