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겹게 독일 베를린에 갔는데, 베를린필이 없었다

[arte] 이현식의 클래식 환자의 병상일지
딱 17년전 이맘 때였다. 내가 처음으로 베를린에 간 것은. 가톨릭 교인이 성모상 모셔놓고 살듯 나는 카라얀 초상을 책상 위에 걸어놓고 자랐다. 나에게 베를린은 예루살렘이었다. 9월 첫주를 내가 선택한 건 아니었다. 업무 일정상 가게 된 출장이었다. 그래도 가슴이 뛰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드디어! 필하모니 콘서트홀에 가서!! 베를린필의 연주를 들어야지!!!그런데… 베를린에 베를린필이 없었다.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알아보니 원래 그렇단다. 9월 첫주는 베를린음악축제(Musikfest Berlin) 기간이라 다른 오케스트라들이 베를린 필하모닉 연주장에서 공연을 하고, 정작 베를린필은 해외 순회공연을 다닌다는거다.
사진출처 = 본인 제공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하늘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어쨌든 좋은 공연들을 봤다.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지휘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로 말러 대지의 노래 (위 사진), 마렉 야노프스키 지휘 베를린방송교향악단 연주로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레오니다스 카바코스 협연)과 슈만 교향곡 4번을 들었다.(아래 티켓 사진). 2006년의 서울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콘서트들이었다.
사진출처 = 본인 제공
그 오케스트라 본연의 소리는 해당 악단의 전용 홀에서 들어야 진짜라고들 한다. 홀의 소리가 전체 사운드에 주는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베를린필은 세종문화회관에서 들어도 안 좋은 건 아니지만 베를린의 필하모니 홀에서 들어야 진짜 베를린필 소리다. 빈필은 카네기홀에서 들어도 좋지만 무지크페라인 황금홀에서 듣는 소리가 진짜 빈필의 사운드다.문제는 전용 홀에서 그 악단을 만나기가 의외로 쉽지 않다는 거다. 국제적으로 명성 있는 인기 악단일수록 타지에서의 공연 등 일정이 많다. 직장을 다니는 애호가들은 아무래도 여름휴가기간에 맞춰 관광도 하고 공연도 보고,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일정을 구상하게 되는데, 여름휴가 기간은 더더욱 유명악단을 전용홀에서 만나기 힘들다. 그들도 여름휴가 기간이라 그렇다.

비싼 개런티를 받는 유명연주자들의 집단이 여름 휴가기간이라고 마냥 노는 건 아니다. 이들은 각지에서 열리는 음악축제에 가서 연주한다. 대표적인 게 잘츠부르크 음악축제다. 모차르트와 카라얀과 <사운드 오브 뮤직>의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는 매년 여름 성대한 클래식음악의 향연이 열린다. 한여름에 빈에 가면 빈필이 없다. 빈필은 잘츠부르크에 머물면서 여러 차례의 연주를 소화한다. 잘츠부르크에서 전설적인 명연주도 많이 남겼다.

스위스의 루체른이나 독일의 바이로이트에는 여름마다 유명 오케스트라의 수석급 연주자들이 모여서 축제 오케스트라를 구성한다. 이들의 연주력은 웬만한 유명 상설 오케스트라를 찜쪄먹을 정도로 높다. 특정 오케스트라가 한 음악축제에 상주하면서 기둥역할을 하기도 한다. 미국 동부의 명문 악단인 보스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탱글우드 음악축제가 그런 경우다.
탱글우드 음악축제, 2008년. 전면의 건물이 개방형 음악당인 ‘쿠세비츠키 뮤직셰드’. 필자 촬영
여름 휴가철에는 단기 이벤트성 야외콘서트도 많이 열린다. 빈필의 쇤브룬 궁전 여름음악회, 베를린 숲속에서 열리는 베를린필의 발트뷔네 음악회는 영상물로도 인기다. 빈과 베를린의 음악애호가들이야 늘 전용 홀에서 이 악단을 들으니 여름에 가끔 밖에서 듣는 것도 별미일 것이다.

그런데, 악단들이 여름에 자기 도시, 자기 전용홀을 떠나는 전통은 왜 생겼을까? 고객님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도시들은 돌로 지어졌고 건물도 다닥다닥 붙어있다. 마차가 돌아다닌다. 말들이 똥과 오줌을 싼다. 여름엔 냄새가 많이 났을 것이다. 부유한 귀족들은 한적한 교외로 나가 숲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여름을 보냈다. 예로부터 고급문화의 고객이자 후원자인 그들이 없는 도시에 오케스트라가 남아서 할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그 영향으로, 지금도 서구 클래식 음악계의 1년 시즌은 9월 중순에 시작해 5월이면 대략 마무리되는 사이클로 돌아간다.

이 글을 쓰다보니 부쩍 해외 음악여행을 다시 가고 싶어졌다. 빈에 세 번 갔는데 제대로 된 빈필 황금홀 콘서트는 한 번 밖에 못봤다. 필하모니 베를린에서 베를린필 연주를 듣는 것도 여전히 미실현 목표로 남아있다. 바이로이트 축제도 예전같지는 않다지만 바그네리안으로서 한 번은 가봐야 할테고. 그 외에도 별처럼 많은 공연장과 연주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버킷리스트에 여전히 달성할 목표가 많으니 취미생활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