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썩한 하루키 신작… 문장력도 서사도 딱 하루키답다

[arte] 책 리뷰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문학동네
768쪽 | 1만9500원
무라카미 하루키. (사진 촬영:ELENA SEIBERT)
"언제 적 하루키입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소설의 국내 출간 즈음, 한 출판사 편집자가 지겹다는 듯 말했다. 1990년대 출판계를 휩쓸었던 '하루키 신드롬'은 지나간 지 오래고, 청춘을 노래하던 하루키는 이제 칠십대 중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키는 하루키다. 그 편집자가 몸담고 있는 출판사 역시 이번 책의 국내 판권 경쟁에 참전했었다. '언제 적 하루키냐'는 의구심과 '제2의 하루키 신드롬'에 대한 기대감. 지난 6일 국내 출간된 하루키의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두 가지 시선을 동시에 받고 있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4월 일본 현지 출간때 벌어진 서점 '오픈런', <파친코>를 웃돈다고 알려진 치열한 선인세 경쟁…. 국내 출간 전부터 이미 화제작이었다. 예약 판매만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출판사 문학동네는 예약 판매 도중에 3쇄를 찍었다고 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출판사의 설명에 따르면 "하루키의 세계를 집약한 결정적 작품"이다. 이미 발표했던 단편소설을 40년 만에 다시 장편으로 고쳐 썼다. 도서관, 그림자, 비틀스, 재즈 등 하루키가 즐겨 사용했던 소재가 고스란히 등장한다. 바꿔 말하면 사람들이 익히 아는, 예측가능한 바로 그 하루키 소설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하루키 세계로 들어가는 완벽한 입문작"이라는 설명도 일리가 있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인공인 '나'는 열일곱 소년 시절에 열여섯 소녀인 '너'를 만난다. 둘은 글쓰기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급격히 가까워지는데, 소녀는 진짜 자신은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도시의 도서관에 있고, 주인공이 보고 있는 자신은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30대가 된 주인공은 소녀를 만나려 도시에 간다. '진짜' 소녀가 있는 도서관에서 그는 '오래된 꿈 읽기'를 한다. 소녀가 주인공은 '꿈 읽는 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으므로.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진열된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문학동네 제공
하루키는 하루키다. 추상적인 내용에 800쪽에 가까운 압도적 분량에도 소설은 매끄럽게 읽힌다. 도입부 풋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을 간질인다. '나'가 '너'의 손을 바라보며 그 작은 손으로 어떻게 병뚜껑을 따거나 여름밀감의 껍질을 벗기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이야기가 느슨해질 때쯤 등장하는 성적 묘사도 하루키답다.

그러나 기시감은 지울 수 없다. 약 40년 전 냈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의 자기복제란 인상이 강하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세계의 도서관에서 '오래된 꿈 읽기'를 한다. 자신의 그림자와 분리된다는 설정도 같다. 현실과 비현실, 의식에 대한 탐구도 이어진다.

애초에 다시 쓴 작품이다. 하루키는 1980년 문예지 '문학계'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발표했다가 일부 설정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 활용했고, 43년 만에 장편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으로 새로 선보였다. 2부부터가 진짜다. 현실 속 중년이 된 주인공이 어느 작은 도서관의 관장이 되면서 겪는 일을 그렸다. 고야스, 옐로 서브마린 소년 등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며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자와 나의 경계, 현실과 도시의 경계를 뒤흔드는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지며 소설은 전작의 기시감을 다소 씻어낸다. 완벽하게 봉쇄된 듯한 도시에 균열을 내는 게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코로나19를 겪으며 하루키가 새로 발굴한 이야기일 것이다.

문제는 이미 1부가 200쪽이 넘는다는 것.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하다보니 전개가 늘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공포로 위장한 도시처럼 1부의 벽을 넘어서야 이 책의 진면목을 비로소 만날 수 있다.

'하루키 감성'은 예전만 못하다. 위스키, 재즈, 파스타 요리 같은 서양문화의 요소를 통해 감각적 묘사를 꾀하는 하루키의 전략은 20대도 위스키를 마시는 2023년 서울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듯하다. 유명 작가는 매 작품마다 과거 자신을 넘어서야 하는 가혹한 처지에 놓인다. 하루키는 과연 하루키를 이겼을까. 출간 직후 판매 순위는 그 답을 모른다. 멋들어진 초판 양장본을 입은 채 책장에 꽂혀만 있는 책은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얼마간 시간 지난 후에 책을 완독한 독자들의 감상만이 답해주겠지.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