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압축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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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 동국대 총장로버트 레드퍼드 감독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려본다. 미국 몬태나주의 시골 마을에서 행복한 삶을 살던 목사 가족 이야기다. 영화 초반부에 중요한 장면이 많다. 예컨대 아이들은 학교 대신 홈스쿨링을 한다. 여가시간엔 강가에 나가 플라잉 낚시를 하는 게 이들 가족의 일상이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은 목사인 아버지가 지도하는 글쓰기 수업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작문 과제를 내고 잠시 뒤 평가한다. 반으로 줄이라는 게 과제의 전부다. 반으로 줄여오면 다시 반으로 줄이라고 요구한다. 마지막은 한 문장으로 줄여질 터다. 문장 훈련을 혹독하게 받은 아들들은 나중에 대학교수도 되고 신문기자도 된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문장 줄이기 연습을 해보니 효과가 작지 않았다. 학생들은 결국 마지막 한 문장을 선택해야 한다. 주제가 들어 있는 문장을 쓸 수밖에 없다. 문장을 줄여나가는 동안 자기가 핵심 문장 작성에 얼마나 치밀하지 못한지 반성하게 된다.핵심 문장이 없는 글은 산만하다. 요점 없는 다변은 실속도 없다. 간단명료하게 말하고 쓰는 훈련은 기능적 효율만을 지향하진 않는다.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을 출간하고 책이 얼마나 판매되는지 궁금해서 출판사에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는 물음표(?) 하나만 있었다. 판매 실적이 궁금하다는 뜻이다. 출판사는 잘 팔리고 있다는 메시지로 느낌표(!)를 적어 보냈다. 이것은 세상에서 제일 짧은 왕복 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압축 기능의 극단적 사례다. 하지만 압축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로 미의 영역이다. 이런 미를 ‘압골미’라고 한다. 책 한 페이지를 읽어도 압골된 한 문장을 발견하지 못하면 심미적 즐거움이 생기지 않는다.
휴대폰 문자로 의사소통하는 게 다반사인 요즘 세상이다. 사람들은 긴 문장을 싫어한다. 철학서나 장편소설은 선택지에서 점차 멀어진다. 성찰의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고 마약 같은 중독성 있는 언어가 선호된다. 압축의 단점이기도 하다. 아무리 압축해도 핵심을 요약하는 ‘압골’이 없으면 뇌 속에 지푸라기만 가득한 허망한 인생이 되기 쉽다.
압축은 압골의 형태로 드러나야 강하고 아름답다. 5000만 글자가 넘는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다섯 글자로 요약하는 실험을 해봤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국어로 옮겨보니 ‘착하게 살자’가 적격이었다. 위대한 경전도 소통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사람들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사건 사고 많은 세상이다. 어떤 언어가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비난과 비판 대신 문제 해결의 언어를 찾아보자. 나는 이보다 더 순수하고 강력한 답을 알지 못한다. ‘착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