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대한민국' 국호 쓴 김정은의 속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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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고착화나 핵사용 결의 표명국호(國號)는 정체성과 정통성을 표상한다. 소속감과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하며 정치적 대표성을 상징한다. 국명과 관련한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마케도니아는 독립 이후 ‘마케도니아’ 국명에 반대하는 그리스와 갈등을 겪다가 ‘북마케도니아공화국’으로 타협했다. 대만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13개국은 대만을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 정책’을 지지하는 대다수 국가와 국제기구는 대만을 ‘차이니스 타이페이(Chinese Taipei)’ 또는 ‘타이페이, 차이나(Taipei, China)’로 칭한다.
대남전략 변화 파악, 대책 세워야
박희권 한국외국어대 석좌교수
남북한 간에도 긴장관계가 지속되고 있다. 국호가 역사적 정통성이나 국제적 합법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외교관이던 필자는 냉전시대 국제무대에서 북한을 ‘North Korea’로 불렀다. 예외적 경우에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칭호를 사용했다.국호가 정통성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북한은 ‘DPRK’ 사용에 집착한다. 국제사회에서 ‘Korea’가 대한민국으로 인식되는 현상에도 분개한다. 언젠가 ‘북한’이라는 호칭을 쓴 필자에게 제3국 주재 북한대사는 “북한이라는 나라는 없다”고 화를 냈다. 주유엔 북한 차석대사는 ‘North Korea’가 ‘부정확하고 정치적 의도를 가진 호칭’이라고 비난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South Korea’를 고수한다.
오늘날 우리 정부는 국제무대에서 북한을 ‘DPRK’로 부른다. 올해 유엔 인권이사회와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북한을 ‘DPRK’로 지칭했다. 입장 변화의 배경으로, 국제적 위상 제고에 따른 자신감, 북핵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 및 ‘DPRK’ 사용이 명시적, 묵시적으로 국가 승인의 효과를 발생시키지 않는 점을 들 수 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도 최근 ‘DPRK’ 호칭을 자주 사용한다.
남북한은 기본합의서에서 서로를 정치적 실체로 인정하되 국가성은 부인했다. 따라서 남북관계에서 합의서나 공동선언 등을 제외하고 국호를 사용할 여지가 적었다. 남북한은 회담에서 ‘남측’ ‘북측’ ‘귀측’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사용했다. 북한은 우리를 ‘남조선 당국’이라고 불렀으며 관계 악화 시에는 ‘남조선 괴뢰도당’이라는 멸칭을 사용했다.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대한민국’이라는 호칭을 썼다. 지난 8월 말 북한 해군사령부 연설에서다. 한국을 비난하면서 사용했다고는 하나 최고지도자의 국호 사용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우선, 남북관계를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에서 국가 간 관계로 재설정하려는 의도다. 통일 전 동독은 흡수통일을 두려워해 양독 관계를 국가관계로 하자고 서독에 제의했다. 서독은 수용하지 않았다. 동방정책을 추진한 브란트조차 동독을 국제법상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국제적 고립이 심화하고 경제위기를 포함한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북한이 두 국가 체제로 분단을 고착화, 제도화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려 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둘째, 핵 교리와의 정합성 추구다. 북한은 대남전략으로 민족 공조를 선전해 왔으나 같은 민족에게 핵을 선제공격 수단으로 사용하겠다는 핵 교리로 한계에 부딪혔다. 차제에 민족이라는 수사를 버리고 적대정책을 취하겠다는 결의 표명일 수 있다.
북한은 외교전략 전환을 꾀하고 있다. 그동안 ‘진영 불가담’을 견지해 온 북한은 북·중·러 간 결속을 강화하고 있고, 노동당 전원회의에선 ‘군사기술적으로, 정치외교적으로 예민하고 기민하게 대응해야 할’ 절박성을 언급했다. 북한 지도자의 ‘대한민국’ 국호 사용은 생존을 위한 변화 징조다. 원인과 배경을 진단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