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산돌을 주워다 물을 주어 기르는 마음 [고두현의 아침 시편]

첫사랑의 시
서정주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열두 살이었는데요.
우리 이쁜 여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해서요.
손톱도 그분같이 늘 깨끗이 깎고,
공부도 첫째를 노려서 하고,
그러면서 산에 가선 산돌을 줏어다가
국화밭에 놓아두곤
날마다 물을 주어 길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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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시인이 살아 계실 때 서울 관악구 남현동 자택으로 찾아가 뵙곤 했습니다. 지금은 ‘미당 서정주의 집’이라는 문화공간으로 개방돼 있지요.

그 집 정원 한편에 작은 쉼터가 있습니다. 일반인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단장하면서 새로 만든 공간이죠. 방문객들이 앉아 쉬거나 간혹 시낭송회를 여는 곳인데, 몇 해 전 찾아갔을 때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미당의 시를 낭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지요. 저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미당의 ‘첫사랑의 시’를 읊조려 보았습니다. 어릴 적 이쁜 여선생님을 좋아하던 열두 살 소년 시절로 금방 돌아간 듯했지요.좋아하면 닮고 싶어진다고 했습니다. 땟국 꾀죄죄한 시골 촌뜨기의 눈에 여선생님의 연분홍 손톱은 얼마나 맑고 고왔을까요. 부드러운 눈빛과 목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을까요. 그런 여선생님을 닮고 싶었을 것입니다. 잘 보이고 싶어서 공부도 1등을 노려서 열심히 하고, 손짓발짓 온갖 행동도 더 착하게 하려고 노력했겠죠.

여기까지는 그래도 열두 살짜리의 생각이라 납득이 갑니다. 그런데 그다음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요. 혼자 산에 가서는 속마음과 닮은 돌을 하나 주워 와서 국화밭에 놓아두고 물을 주다니요. 그렇게 물을 주어 기르는 생각을 했다니요! 날마다 물을 주어 기르면 산돌이 자랄 거라고 믿는 그 마음이 정말 이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렇게 믿는 마음이 곧 사랑이지요. 그게 첫사랑의 마음이고 첫사랑의 시입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의 첫사랑은 열두 살 때나 어른 때나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미당은 1970년 공덕동에서 이곳 남현동으로 이주한 뒤 ‘없는 살림에 마누라와 실랑이까지 해가면서’ 30년간 돌과 나무를 사들이며 정성껏 정원을 가꿨지요.그 속에는 어린 시절 남몰래 주워 와서 물을 주어 길렀던 산돌도 있었을 겁니다. 그에겐 첫사랑의 시를 비롯한 모든 문학이 돌과 꽃과 나무에서 나왔습니다.

맥주를 밥보다 더 즐겼던 그가 맥주잔을 들고 건배사를 외치듯 시를 줄줄 외워대던 장면 또한 눈에 선하군요. 그의 맥주 사랑은 유별났습니다. 누가 찾아올 때도 늘 맥주를 사서 오는 걸 제일로 반가워했죠. 며느리가 건강을 걱정해서 가끔 무알코올 맥주로 바꿔치기할 정도였습니다.

돌아가시기 3년 전인 1997년 여름에 미당과 함께 그 정원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보니, 옥양목 한복 차림의 흰 고무신 발치께에 몇몇 산돌과 상사화 잎이 보입니다. 그때 제 수첩에다 떨리는 손으로 비뚤비뚤 친필 휘호를 써 주고는 “햐, 손이 떨리는 걸 본께 맥주가 모자란 모양인디…”라며 농담하던 모습도 아련합니다.저세상에서도 그 장난스러운 표정은 여전할까요. 이쁜 선생님을 너무나 좋아해서 산돌을 주워다가 국화밭에 놓아두고 날마다 물을 주며 여태껏 기르고 있을까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